당신은 흰 도화지를 앞에 두고

by 김희진

당신은 흰 도화지를 앞에 두고, 무엇을 그릴 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인가요?

언젠가 미술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릴 기회가 주어졌었는데, 그 순간 가장 놀라웠던 점은

'잘'그릴 수 있는 이들은 많았지만, '무엇'을 그릴 지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흰 도화지를 워드의 흰 바탕 화면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는 매일 흰 워드를 뛰어 놓고, 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만 누르기를 흔하게 반복하곤 하니까.

무엇이든 그리고 쓸 수 있다는 자유는, 때로는 아무것도 그릴 수도 쓸 수도 없게 하기도 한다.


사실은 말을 할 때도 비슷한 고민에 자주 빠진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상대가 뱉은 말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추임새를 넣는 것은 웬만한데, 스스로 화두를 던지고 대화를 시작하기는 영 쉽지 않다.

검색어 1위에 오른 연예인의 가십 말고, 우리보다 잘 나가는 누군가의 험담 말고, 날씨 이야기 말고, 영화 줄거리 말고, 우리는 어떤 창의적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대화에서 나와는 다른 '어떤 생각', '어떤 의견'을 나에 대한 공격이나 무시가 아니라 건설적인 의견 교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어서, 즐거운 대화가 하고 싶어서, 대화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 진다.


우리 사이에 대화의 흰 도화지를 앞에 두고

나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해 마음에도 머리에도 없는 아무 색을 마구 발라 버리고, 그저 '소리 내기'에 지나지 않는 말 같지 않은 말의 폭주를 해대며 내가 나를 막지 못할 때.


서로의 말을 부정하며 서운함만 쌓이는 대화 말고

우리 삶에 하등 관련도 없는 누군가를 비난하는 대화 말고

잘 보이고 싶어 그냥 동조해 버리는 대화 말고

싸우기 싫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척하는 대화 말고

진짜 내 안에 창의적인 화두를 던져서 그것을 탄력 있게 주고받는 포만감이 느껴지고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나로서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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