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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진 Sep 04. 2020

엄마와 나란히 걸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2020/09/04

오늘 살아서 좋았던 점

"상쾌해진 바람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는 요즘이네요."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누군가의 인사였다.

그래,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 나날이다.

'평범한 오늘'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점점 조그마해지고,

'달라진 일상'을 이제 '평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그러기엔 아직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되지 않아서 이건 말도 안 돼, 라는 반항심만 커져간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순간순간, 이게 뭔가 싶은 현타가 오고

뉴스에 질리면서 뉴스를 끄지 못하고

지금 누가 마스크를 내리는가, 지금 누가 손을 씻지 않았는가, 에 촉각을 곤두 세우게 되는 것이  

이 병의 진짜 나쁜 점은 주변을 의심하고, 사람을 경계하고, 우리가 멀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날들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2.5단계로 바뀌고 내내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엄마랑 둘이서 동네 천변을 산책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둔 거대한 폭포 앞에 나란히 앉아서 멍하니 떨어지는 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옷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엄마는 요즘 외출복을 입을 일이 없어 아쉽다며 푸념을 했고,

오늘의 OOTD를 사진으로 남겨 달라 부탁했다.

찍힌 사진을 넘겨 보던 엄마가 마스크를 쓰고 찍은 게 영 아쉽다고 하길래,

"마스크를 쓰고 찍은 게 2020년의 추억이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발 추억이 되길...이라고 바랐다.   

다시, 엄마와  인공 폭포를 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엄마는 폭포 앞에서 예쁘게 포즈를 취했고, 나는 그런 엄마를 사진으로 남겼다.

가을 하늘이 공활했고, 바람 경쾌했다.

볼에 닿는 바람을 느낄 수 없음이 조금 슬프긴 했지만, 오늘은 이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정리한 것

요리가 자꾸 들러붙는 오래된 냄비를 버리기로 했다.

살림살이에 별 욕심도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 현재 가지고 있는 세간살이는 대부분 자취를 시작할 때 엄마가 본인 살림을 쪼개 준 것들이다.

그게 서른 살 때였다. 엄마는 곧 시집갈 테니 일단 이것들 쓰다가 결혼할 때 새로 사라고 했는데, 그렇게 7년이 흘렀고, 아무래도 시집으로 인한 살림 리셋은 요원해 보인다.

심지어  엄마가 챙겨 준 살림들 중에 아직 뜯지도 않은 것들 태반이다.

냄비를 시작으로 물꼬를 터야겠다. 싱크대 속에 채워 둔 언젠가를 기약한 그릇들을 버려야겠다. 언젠가는 그 언젠가가 오면 그때 어떻게든 대처해보기로 하고... 지금은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언젠가를 위해 미리 채워두지 말아야겠다. 가벼워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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