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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마음 Mar 27. 2020

배만 채우면 된 걸까? (2)

두 계절이 지나갈 때쯤 어머니의 서울 나들이 날짜가 다시 잡혔다.

오시기로 한 날짜가 다가올수록 꽉 찬 냉동고를 바라보며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저걸 언제 다 먹지... 

밀린 숙제 처리하듯 급하게 냉장고 정리가 시작되었다. 더 이상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슴슴한 국을 매 끼니마다 해동시켜 억지로 먹었다.

그냥 밖에서 사 먹고 들어오면 설거지거리도 안 생기고 편한데... 게다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어머니 정성이 있지. 일단 먹자...'


드디어 오시기로 한 날짜가 되었고, 예상대로 어머니는 짐을 내려놓자마자 냉장고 체크부터 하셨다. 텅 빈 냉동고를 보시고 흡족해하시며 나름의 비장한 각오로 식사 준비를 하셨다.

나의 원룸은 또다시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온 집안을 휘감는 연기를 체념한 듯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다 식탁의자에 앉아 어머니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 지난번 일이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밥투정하지 말자란 생각이 든다.


"맛있제?"

"네. 맛있어요."

"일은 어떻노?"

"괜찮아요."


너무 변해버린 나의 혀는 더 이상 어머니의 음식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냥 적당히 배만 채우자란 생각으로 음식을 넘겼다.


일주일 후 어머니는 가셨지만 집안 가득 밴 생선구이 냄새는 일주일이 지나도 가시질 않았다.

이 냄새는 대체 언제쯤 빠질까?




독립한 지 어느덧 10년이 되던 해.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음식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배만 채우는 심정으로 말없이 먹기만 했다. 회사 얘기도 하기 싫고, 일상 얘기도 하기 싫었다. 

딸내미가 어찌 사나 궁금하셨을 어머니의 이런저런 물음에 나는 그저 '괜찮아요.' 이 한마디로 끝을 지었다.

대화를 단절시키는 대답... 


사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입맛만 변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가 많이 변해버렸다. 

냉동고를 가득 채운 국들은 나의 뱃속을 채우는 대신 음식 쓰레기통으로 향한 지 오래였다.

처음 버릴 땐 죄스러웠으나 나쁜 짓도 반복되다 보니 무심해졌다. 속사정을 아실리 없는 어머니는 매번 깨끗이 비워진 냉동고를 보시며 지금껏 내가 잘 먹고 있다고만 생각하셨다. 

그러다 결국 내가 사달을 냈다.




어머니는 된장국을 끓이실 때 육수를 내기 위해 다시마를 넣으신다. 그런데 그 다시마가 문제다. 어머니는 다시마가 영양도 좋고 그냥 버리기엔 아깝다며 잘게 썰어 넣으셨고 꼭꼭 씹어먹으라고 하신다. 씹을수록 맛이 있다는데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맛의 세계다. 그렇게 오래도록 끓여진 다시마는 육수의 제 기능을 넘어서 맛을 헤쳤다. 된장국에서 쓰고 비린 맛이 났다.


가뜩이나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집에 돌아오면 맡게 되는 비릿한 생선구이 냄새와 각종 음식 냄새는 퇴근해서 바로 뻗어버리고 싶은 나에게는 정말 곤욕이었다. 

쌓였던 짜증이 결국 터지다 못해 그간 쌓였던 불만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어머니에게 대못을 박았다.


"다시마 좀 빼면 안 돼요?"

"왜? 맛있는데. 잘게 썰어서 먹기도 편하게 해 놨구만."

"다시마 때문에 된장국에서 쓴맛 나요. 도저히 못 먹겠어요."

"이상하네... 엄마 입맛엔 맛있는데."

"어머니 입맛에만 맞죠. 제 입엔 안 맞아요. 제발 몸에 좋다고 한꺼번에 넣고 끓이지 좀 마세요. 국물 맛이 하나도 안 나요. 그리고 원룸이라 환기도 안되는데 온 집안에 음식 냄새 배여서 미치겠어요. 옷마다 이상한 냄새 배여서 한참이 지나도록 냄새가 빠지질 않아요. 그냥 요리 안 하시고 편히 쉬고 계시면 안 돼요? 집에 오면 편히 쉬고 싶은데 쉬지도 못하고 저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냉동고에 넣고 가시는 국들 안 먹어요. 어머니 오시기 전에 싹 다 버려요. 음식 해놓고 가지 마세요. 먹지도 않는 거 힘들여서 하실 필요 없어요."


딸내미의 모진 말을 잠자코 들으시던 어머니는 '알았다' 한마디만 하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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