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떤 일을 하기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지는 하기 싫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좋아하는 일과 적성은 다를 수 있지만, 대개는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 가사도우미가 갑자기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집안일을 하게 되면서 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평소보다 책도 더 보고 서점도 자주 가서 책을 많이 사고 읽게 되었다.
과거 젊은 시절 소개팅을 나가서 내 마음에 안 드는 상대를 만나고 있을 때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이 내가 진정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평소 곁에 있을 땐 모르다가 싫은 상대를 마주하면서 알게 된 적도 있다.
사랑은 잃어보면 그 소중함을 안다. 그 대상이 돈이나 물건, 일이면 다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다시 찾기 어렵다. 애인은 헤어지고 다시 만날 수 있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은 다시 만나기 어렵다. 꿈에서가 아니라면. 그래서 부모님한텐 잘해야 한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 내가 하기 싫어하는 일들은 모두 어머니께서 해주셨다. 집안일, 정리정돈 등. 요즘 집안일을 하면서 공부도 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첫째 시간이 부족하다. 내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지금처럼 집안일 등에 시간을 뺏긴다면 의대공부는 커녕 의대도 갈 수 있었을까 싶다. 다 뒷받침해 주신 어머니 덕이고 돈 벌어주신 아버지 덕이다. 집안일은 기본이고 아르바이트해서 돈까지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거 내가 이룬 것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집안일해 가며 아르바이트해 가며 공부까지 하는 학생들을 보면 대견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예는 멀리서 찾을 게 아니라 가까이 내 아버지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아버지께선 일찍 부친(내 조부)을 여의시고 자수성가하셨다. 중고등학교 때 테니스 선수 생활을 하시면서 장학금을 받으셨다. 전교생 심지어 다른 학교 학생들 명찰 사진을 찍어주시고 학비를 버셨다. 그렇게 의대 진학을 하시고 의사가 되셨다. 어찌 보면 아버지의 엄청난 자기 관리 능력은 타고난 것만이 아니라 후천적으로도 길러진 것 같다. 지금 내가 뒤늦게 마주하는 로드(load)는 날 단련시키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고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많은 걸 잃어버린 지금이 돼서야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많은 걸 갖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내가 잃어버린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건 어머니의 사랑이다. 어머니께서 실질적으로 챙겨주시는 것 외에도 그냥 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내게 얼마나 큰 버팀목이었는지 이젠 알겠다. 그래도 아버지라도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하다.
힘들다고 불평하면 끝이 없고, 감사할 걸 찾아보면 너무나 많다. 좋은 부모님을 주셔서 감사하고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 의사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많이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다. 가르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살아 숨 쉴 수 있음에 감사하다. 하루 세끼 배불리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마트에서 장을 보고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원이 있다면 어머니께 내가 손수 만든 맛있는 진지를 차려드리는 것이다. 평생 받아먹기만 했지 한 번도 내 손으로 요리해서 진지를 차려드린 적이 없다. 돌아가시고 제사 때 정성껏 차려드리지만 돌아가시고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어머니께서 생전에 그리도 보고 싶어 하시던 며느리와 손자도 못 보여드려서 죄송하다. 언젠가 생기면 반드시 어머니 납골당에 같이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다.
아직 이룬 게 별로 없는 삶의 장점은 앞으로 이룰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날을 위해 노력하고, 일단 장 봐온 걸로 방금 퇴근하신 아버지 저녁을 차려드려야겠다. 나도 먹고. 맛있는 걸 먹을 생각하니 행복하다. 행복은 거창한 것에 있지 않다. 사소한 것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