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측한 상처를 바라보며
'밝아야 한다.' '긍정적이어야 한다.' '열정이 넘쳐야 한다.'
20대에 쓴 나의 가면들이다.
우울하고 외로운 나, 무기력하고 자신감 없는 나.
부족한 나를 가리기 위해 많은 가면이 필요했다.
가족의 죽음을 겪고 무대에서 힘차게 웃어야 하는 개그맨처럼 살았다.
우울하고 슬픈 나를 인정하면 정말 그렇게 될까 봐,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 다시는 못 일어날까 봐,
지금껏 버텨온 내가 무너질까 봐.
부족하고 못난 나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소외당하고, 미움받는 게 두려워서,
힘든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니 덮어두고 외면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외면한 감정은 고스란히 내 안에 남는다.
덮어둔 감정은 언젠가 물밀 듯 터져 나와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된다. 외면 아닌 직면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감정은 신호다. 내 마음을 봐달라는 신호.
지금 이곳이 아프니 봐달라며 sos를 보내는 것이다.
감정일기를 쓰며 두려웠던 감정의 실체를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수술 부위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며 한 땀 한 땀 치료하듯,
내 마음을 세밀하게 바라보며 치유하는 시간을 보냈다.
덮어둔 상처가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곪아있다는 것에 놀라기도 했고,
큰 감정에 허둥대며 어쩔 줄 모르는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온전한 사랑을 경험한 적 없기에 모든 상처를 다 감싸 안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사가 되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명의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 듯,
나는 내 마음의 명의가 되기 위해 수련하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흉측한 생채기는 감추고 싶었다. 내 일부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감추고 버리려 할수록 상처는 자신을 봐달라며 아우성친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상대를 보면 ‘너도 아팠구나’ 쓰렸다.
내 안에 미해결 된 상처가 쿡쿡 찔리며 마치 상대의 아픔처럼 보였다.
내 상처가 아물고 온전해지면 어떤 아픔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고통처럼 보이고,
온전한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온전해지 듯 말이다.
마음의 상처가 온전해지는 길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픈 손가락을 잘라낼 수 없듯 상처를 받아들이며 품고 사랑하는 것이다.
너도 내 일부구나.
너도 소중한 나구나.
자식처럼 껴안고 품을 때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