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고통
함께 할 수록 행복한 만남이 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갔냐며
헤어지기 아쉬워 다음을 기약한다.
편하게 나를 드러내고, 너를 존중하며 마음으로 보낸다.
반면 표정이 사라지고,
한숨이 푹푹 쉬어지는 만남이 있다.
시간은 왜이리 천천히 가는지 야속하다.
불편한 사람을 떠올리다
그들의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옳다'가 강한 사람.
'내가 맞아. 너는 내 말에 따라.'
한마디로 '답정너'다.
('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해.')
자신과 다른 의견은 비난하며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훈계로 대화가 이어진다.
답정너는 '틈'이 없다.
소통의 틈이 없고, 이해와 존중의 폭이 좁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면 잘한 것이고
반대되면 비난의 화살이 날아온다.
사실 답정너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맞다. 틀리다. 잘한다. 못한다. 좋다. 싫다.'
삶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며
누군가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가면
상대를 설득하고 바꾸려 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하니
나만의 답이 강하다는 것은
삶에 대한 '불안'이 많다는 뜻이다.
내 삶이 잘못될까 봐.
망할까 봐.
잘 못 살까 봐.
소중한 네가 잘못될까 봐.
알지 못하는 미래가 두려우니
'맞다'고 믿는 답을 만들고
나만의 안전하고 견고한 성에 들어가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 경험 중 이것이 최고'라는 믿음도 있을 것이다.
십여 년 전 많은 부모가
자식에게 공무원을 시키려는 것과 비슷하다.
안정되고 보장된 삶이라 생각했기에
이 길을 걸어야 안심이 됐던 것이다.
불안이 강할수록 삶을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삶은 통제의 영역이 아니다.
미래는 알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변수는 항상 존재한다.
통제 욕구가 강할수록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저 흘러가는 삶 속에서
나만의 단단한 중심과 방향을 가지고 유연하게 사는 것.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면
내면도 외면도 평온할 것이다.
만일 내가 이해 안 되는 사람이 많고
소통이 안되고 인간관계가 어렵다면
타인의 삶에 자주 화가 나고
틀렸다는 비난을 한다면
내가 만든 정답이 강한 건 아닐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나는 어떤 기준으로 타인을 바라보는가.
무엇을 맞다고 믿나.
무엇을 틀렸다 보는가.
내 믿음이 삶에 어떤 도움이 되나.
이 믿음으로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삶이 평온하지 않고 고통을 반복한다면
바뀌지 않는 타인과 세상이 아닌
내가 만든 생각을 바라봐야 한다.
견고한 생각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틈'을 만들고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왜 그럴까 생각하며'
다름에 대한 이해와 노력을 하면
전에는 보지 못한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다.
*최근 브런치 글
'이혼의 끝에서 서로를 이해하기까지'에 이 글과 관련한 사례가 있습니다.
(두 믿음이 충돌하며 겪은 갈등과 다름을 이해하는 과정)
누군가에게 '믿음'은 어쩌면
'목숨'처럼 중요할 수 있습니다.
다른 생각은 삶을 위협하는 공포일 수 있겠죠.
하지만
삶의 고통이 '내 생각, 믿음, 나만의 정답'에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기에 이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생각 알아차림'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스스로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나'가 주인이 되어 하는 '생각'인지
'생각'에 끌려다니는 삶인지.
지금의 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평온한 삶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