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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가득 채워야 하는 건 뭘까?

[노트르담 드 파리] 어쩌면 추악한 것이 나일지도..

by wise

“겉으로는 비웃음 섞인 존경과 환호를 보내면서도 사람들은 속으로 카지모도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갖고 있었다. 그는 비록 꼽추였지만 힘이 무척 셌고, 행동은 민첩했으며, 귀머거리이면서도 심술궂은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특징 덕분에 그는 바보 취급을 당하지 않았던 셈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 중에서


십수 년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교실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곳은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무도 그들의 과거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간이 지나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던 중,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그토록 싫어했던 자신들에 대한 공격이, 이제는 약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과거의 아픔을 복수라도 하듯이, 그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 다른 가해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약하다고 느껴지면, 고민 없이 공격하고 짓밟아버린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할 거라는 불안감에 자신을 구할 수밖에 없다는 이상한 논리로 자신을 변호한다. 대성당 종지기 '카지모도'를 비웃는 것은 그가 꼽추에 안짱다리, 귀머거리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다르다’라는 생각보다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에 조롱과 멸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육체적으로는 쉽게 상대할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에스메랄다'는 어떤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귀족이 아닌 유랑자 집시이며 여자이기에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자신의 삶은 소중하고 귀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면 주변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세계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 조금은 서툴러도 용서가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고 나면 그 보호막이 사라지고 각개전투 상황으로 변한다.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자연 그 자체가 된다. 그런데 자신보다 외부에 집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자신을 공격하는 이들을 안아준다. 합리성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희생을 아무 조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가식이 없고, 비굴함이 없다.

비록 약점과 단점으로 나약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절대 나약하지 않으며 쉽게 이겨낼 수 없다. 지난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합리적이지 못한 이들의 행동과 생각은 우리 인간을 지켜냈고, 인간을 자연의 약육강식 속에 살아남게 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우리에게 비극적 결말 속에서도 순수함과 진정성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작품 속 '카지모도' '에스메랄다'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품은 감정과 신념을 왜곡하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세상의 오해와 부정에 짓눌려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지만, 이들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순수함을 지키며 삶을 끝까지 살아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떤 선택으로 내 삶을 채워 나가야 하는가? 스스로를 감추며 모욕적인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꼽추와 집시여인처럼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프롤로와 그랭구아르, 페뷔스처럼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삶이 아닌, '카지모도' '에스메랄다'처럼 타인의 존재를 진심으로 마주하고, 자신의 순수함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해본다. 세상의 조롱과 오해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 타인을 향한 진정한 연민과 사랑을 간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자신을 지키며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려 보이며, ‘추악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말해준다.

세상은 우리의 선택을 시험한다. 때로는 이기적이고 편한 길을 제시하며, 우리의 진정성과 순수함을 저버리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 우리는 다시 '카지모도' '에스메랄다'를 떠올릴 수 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 또한 이 진정성을 지키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삶의 여정에서 순간순간 추악함의 유혹에 맞서야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자신을 지키고 세상의 변덕스러운 시선에 흔들리지 않으려는 노력, 그것이 곧 존엄한 삶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삶, 이것이 진정한 순수함을 지키는 방법이며, 세상 속에서도 결코 부끄럽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는 길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대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그 진리를 비극적 아름다움으로 가르쳐 준다. 그러니 어떤 고난과 선택의 기로에 놓이더라도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순수함을 잃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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