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가 생겼다
이사 날짜가 정해지고 입주 청소를 하러 가는 내 어깨는 날개가 달린 것 같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뒤꿈치가 몽실몽실 가볍다.
바닥에 올라오는 습기, 곰팡이 냄새 그리고 현관에 벗어둔 신발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를 맡지 않고 잘 수 있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남편이 남긴 퇴직금으로 장만했던 우리의 보금자리는 경매로 넘어갔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빚만 잔뜩 끌어안고 우리 세 식구는 길바닥에 나 앉게 되었지만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던 친정집의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내주고 친정집 1층에 살게 되었다.
(단칸방을 얻기 위한 500만 원을 빌리기는 힘들었지만 새 세입자가 들어오면 갚을 수 있는 1,500만 원은 빌릴 수 있었다.)
가까울수록 돈거래를 하지 말라고 했듯이 가까운 사람들 말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조금씩 빌려서 전세금을 마련했고 1년 가까이 살다가 드디어 영세민영구임대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가 살던 1층은 배수로 공사를 했고 세입자가 들어오면서 받은 전세금으로 빌린 돈은 잘 갚았다.)
친정 역시 재건축 정책으로 3층으로 증축했고 앞집도 뒷집도 다 건물 평수는 넓어졌지만 마루까지 들어오던 따뜻한 햇볕을 잃었다. 특히 1층은 아예 햇빛 구경을 할 수가 없다. 1층 안방에서 창문을 열면 바로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의 뒷집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일 만큼 앞, 뒷집이 가까이 붙어 있다.
증축을 하면서 뒤꿈치를 들어야 뒷집이 보일 만큼의 높이에 작은 쪽창을 내는 것이 최선의 구조였다.
그 바람에 햇볕도 들지 않고 바람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안방은 아들 둘이 사용하고 작은 방은 내가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작은 방은 너무 심한 습기로 인해 금세 옷장이며 침대며 온통 곰팡이에게 점령당했고 그 방에서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아프고 거기에 곰팡내까지 배이는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평소에도 장판 밑은 늘 축축했고 비라도 오는 날은 출렁거림이 느껴질 정도로 물이 괴었다. 햇볕도 들지 않고 배수도 되지 않는 방은 도무지 사람이 생활할 수가 없는 곳이 되었다.
(친정의 증축 공사를 한 업자는 악덕 사기꾼이었고 당시 많은 가구들이 한꺼번에 증축을 하는 바람에 그 틈에 사기 업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다.
작은 방이 있는 곳은 축대 밑이었고 하수관과 축대를 타고 내리는 빗물이 나갈 수 있는 배수로를 만들지 않았던 탓에 그렇게 된 것이다, 작은 방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하자 보수 할 곳이 많았지만 이미 비용을 받은 업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신발을 벗는 곳이 현관이고 한 발짝 떼는 곳이 부엌이고 화장실 문 앞인 좁은 공간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현관문 앞에 묻혀 있는 정화조에서 올라오는 냄새와 벗어 둔 신발의 쾌쾌한 냄새, 수시로 벌레가 들락거리는 곳, 그곳이 1년 가까이 지낸 나의 잠자리였다.
우리의 새 보금자리는 11평(36.36m²)이다. 비록 작은 크기지만 방 두 개와 화장실, 싱크대까지 있을 건 다 있다.
아파트의 규모는 7개 동 1050세대이고 작은 평수지만 5,6명의 가족들이 함께 사는 집도 있었고 홀로 어르신들과 장애인들 그리고 새터민들까지 대개가 기초 생활 수급자들이 많은 부산도시공사의 영세민 영구임대주택이다.
벽지와 장판은 부산도시공사에서 새로 해준 덕분에 깔끔했지만 방치된 베란다는 비둘기의 분비물들로 엉망이었고 청소하는데 한참 애를 먹었다. 평소 친누나처럼 따르던 동생에게서 새시와 베란다 문을 선물 받아서 설치를 했다. 이제 더 아늑하고 안전하고 따뜻해졌다.(귀소 본능이 강한 비둘기들이 한 동안 날아와 창에 부딪히곤 했다.)
큰 방에는 평수에 맞게 붙박이 이불장과 수납장을 만들어 달면서 어른 4명 정도는 끼어서 잘 정도의 공간을 확보했지만 붙박이 찬장 하나 붙일 공간이 없는 작은 방은 큰 아들이 사용하기로 하고 겨우 책상 하나 놓고 나니 꽉 찬다. 저녁마다 의자를 문 밖으로 내놔야 책상 밑으로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가 있다.
11평이면 어떻고 책상 밑으로 다리를 넣어야 누울 수 있으면 어떠랴? 소중하고 귀한 우리 집이 생겼는데... 보증금 125만 원, 월세 5만 원으로(97년 기준) 영원히 살 수 있는 우리 집, 우리가 먼저 나가지 않는 이상 쫓겨날 일 없고 훗날 아이들이 각자 제 갈 길로 가고 나면 혼자 살기에 딱 좋은 우리 집이 생긴 것이다.
(당시 나의 형편으로는 최고의 선택지였지만 딱 거기까지 더 이상의 꿈을 꾸지 않고 머물렀던 대가도 훗날 톡톡히 치르게 된다)
우리가 사는 11층 10 가구와 1층 경비실의 아저씨들에게 시루떡을 돌리며 이사 들어왔다는 신고를 했다. 이사 떡을 돌리는데 어느 한 집도 선뜻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그나마 문을 열어준 사람도 의심 가득한 눈빛과 어설픈 미소를 보이며 떡을 받는다. 대개가 삶이 고달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 보였고 앞으로 이웃과 소통하면서 잘 지낼 일은 거의 없어 보였다.
영세민 영구 임대 아파트는 기초생활수급자등 차상위계층의 사람들에게 주는 주택복지 정책으로 만들어진 아파트다.
-일반 영구임대아파트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부산에는 금곡동, 반송동, 다대포 등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97년 당시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해서 아무나 입주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신청서류를 접수하고 누군가 이사를 나가고 공실이 생겨야 입주가 가능하다고 했으니 언제 내 차례가 올 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다행히 신청 6개월도 되지 않아서 내 차례가 왔고 처음 관리소장과 면담을 하면서 이 아파트 거주민들은 대개가 장애인, 탈북주민, 독거어르신들이 살고 있고 애기 엄마처럼 젊은 여자와 아이들은 거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훗날 6개월 정도 통장도 했다)
“하루라도 빨리 차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이사 오시면 아파트의 이미지 쇄신에 한몫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파트 관리 소장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있었다. 입주 신청 서류를 가지고 아파트를 방문 했을 때의 첫 인상이 생각난다.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며 소주를 마시고 있는 무리와 한 쪽에선 휠체어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사람도 있었고 햇볕을 받으며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노인들과 곁눈질로 나를 지켜보던 시건들까지 솔직히 살짝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입주민이 되고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마주하는 그 분들은 처음 생각과는 다르기는 했지만 아파트 입구에 모여서 그런 인상을 풍기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그림이기는 했다)
현관문을 열어 놓은 집 앞을 지나려면 몸을 옆으로 비틀어야 할 만큼 복도가 좁다. 우리 집은 맨 끝집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 좋고, 현관문과 베란다 문을 함께 열어 놓으면 맞바람이 불어서 여름에는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되었다.
바로 옆에 산이 있고 그 마을 전체에 공장이 없어서 그런지 도심과 기온 차가 뚜렷이 날 만큼 공기도 맑고 깨끗한 곳이다. 베란다 문을 열고 방 창문도 열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에 작은 먼지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나는 춤추는 먼지를 보고 아들은 햇볕을 봤다.
좁은 베란다 창으로 햇볕이 들어오는 우리 집이 생겼다.
곰팡이 안녕, 습기 안녕.
꿈도 목표도 없었다. 굳이 찾자면 아이들 입에 밥만 들어가면 되었고 11평, 영구 임대 아파트 덕분에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막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더 잘 먹고 권세도 누려 본 사람이 더 명예와 권리에 집착하고 돈도 있었던 사람이 더 귀한 줄 안다.
현대판 노예, 그것이 나의 모습이었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급급했고 열심히 일해서 들어오는 돈은 그저 내 통장을 거쳐서 지나가기 바빴다. 때로는 많이 벌기도 했지만 매달 빚을 갚고 나면 언제나 빈털터리 었다.
나는 그때 그럼에도 조금씩이라도 저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달 빚을 갚고 조금이라도 남을라치면 아이들과 분에 넘치는 외식을 하면서 스스로 통장을 비웠다. 이래 저래 항상 외줄을 타듯 불안한 날들을 보냈다.
만약에,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도 여전히 셈은 젬병이지만 그때는 더 그랬다.
난 왜 이럴까?
셈을 하면서 세세하게 계산하다 보면 네비를 보면서도 경로를 이탈하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항상 셈을 포기하고 거기에 맞는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아이고 답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