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 좀 죽여라.”
이 말은 어릴 때부터 숱하게 들어왔다. 감정이 지나치게 드러날 때, 억울하다고 소리칠 때, 고집을 꺾지 않을 때마다 사람들은 조용히, 혹은 날카롭게 그렇게 말했다.
처음엔 그게 옳은 말인 줄 알았다.
성질을 죽이면 내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성질을 죽이고 나니, 어느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도 함께 죽어버렸다.
성질을 억누르는 건, 나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나를 말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를 잃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내 안의 흐름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성질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
성질은 본질이 드러나는 방식이었다.
고유한 흐름, 방향성, 표현, 생명성.
본질이 세상과 만나기 위해 내게 선물한 첫 번째 언어였다.
화를 내는 나, 슬퍼하는 나, 억울해하는 나, 기뻐하는 나.
그건 전부 살아 있는 나였다.
문제는 성질이 아니라,
성질이 본질을 가려버릴 때였다.
성질이 본질을 잊고 자기만 드러나려 할 때,
그때 우리는 흔히 “가렸다고” 말한다.
거울이 빛을 반사하는 도구가 아닌, 빛을 가려버리는 물건이 되는 순간이다.
그래서 필요한 건 ‘죽이는 것’이 아니라 ‘비추는 것’이었다.
성질이 올라올 때, 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조금만 여백을 둔다.
그리고 묻는다.
“이건 나의 어떤 진실에서 올라온 걸까?”
그 짧은 물음 하나가 성질을 고요히 비추기 시작한다.
성질은 그제야 자기 역할을 안다.
가리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구나.
부수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것이구나.
나는 이제 성질을 죽이지 않는다.
대신, 본질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본질이 깨어 있을 때,
성질은 삶을 살아가게 해 주는 가장 정직한 연료가 된다.
그 연료로 말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사는 삶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성질을 살리고, 본질을 잊지 않을 것.
그 두 가지는 같이 갈 수 있다.
실은, 함께일 때 가장 빛난다.
성질은 본질의 흐름이자, 본질은 성질의 뿌리다.
우리는 그 둘 사이를 건너며 살아간다.
살아 있는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