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웰니스족 1>
3.무작정 들이대는 화해제스처

-웰니스아파트 704호

by 힐링가객


두통이 가라앉는 것이 시시각각 느껴진다. 귀 반사 마사지는 반응이 확실해서 좋다. 셀프 임상 데이터에 의거해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대 이봉을 집중적으로 자극한 것이 효과를 본 모양이다. 두통이 가라앉자 몸이 무겁게 처진다.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는 것이 나의 유일한 힐링타임이다. 하지만 오늘은 위층의 소음 때문에 중단했던 업무를 보느라 바빴고, 참다못해 고무 망치를 사용한 뒤엔 여력이 없었다. 주저앉을 것 같은 이 무력감은 오후 3시가 되도록 커피를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찾아온 거였다.


무선 포트에 이온수를 부어 스위치를 올린다. 월 3회 배송받는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싱글 오리진 커피 홀빈 20g을 계량해 수동 그라인더에 넣는다. 그라인더를 감싸 쥔 왼손에 시티 볶음도의 열매가 갈리는 진동이 느껴진다. 동시에 로스팅 과정에서 원두를 팽창시키면서 극대화된 아로마 향이 가스와 함께 터져 나온다. 드디어 나를 위한 오늘의 힐링타임이 시작된다.


전기포트에서 물이 끓기 시작한다. 뚜껑을 열어 정수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염소 성분을 15초간 날려 보낸다. 먼저 드리퍼에 필터를 끼워 서버에 올리고 열소독을 하면서 동시에 드리퍼와 서버를 데운다. 분쇄된 커피를 드리퍼에 옮겨 담자 꽃향기가 한 번 더 공간에 퍼진다. 96도의 온수를 온도센서 포트에 붓고 91도가 된 걸 확인한다.


커피의 양에 비례하도록 정확히 20ml의 온수를 붓는다. 가스가 빠져나오느라 부글거리면서 커피 빈이 만들어진다. 드라마틱한 화학반응을 살피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향기로 커피의 숙성도를 감지한다. 온몸의 세포가 설렘으로 떨리는 브루잉의 첫 번째 단계는 아쉽게도 빠르게 지나간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리드미컬한 핸들링으로 드립 단계별 기분의 변화에 온전히 집중한다. 두 번째 단계의 몽롱한 긴장도 빠르게 지나간다.


드립은 세 번에 나눠서 하는데, 향기 중심으로 마시고 싶은 날엔 첫 번째 추출에 집중하고, 묵직한 바디감을 원할 때는 세 번째 추출에 집중한다. 보통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추출되는 성분이 고루 분배되도록 하는데, 향과 바디감이 적절해서 무난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늦은 힐링타임에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남은 하루를 무사히 보낼 것 같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집중해서 추출하고 세 번째는 짧게 끝낸다. 120ml 추출 후에 평소보다 빨리 드리퍼를 옮기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130ml를 추출했을 때보다 바디감이 가볍다. 한 숟갈 차이지만 미감은 정말 다르다. 핸드드립의 좋은 점은 그날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추출 방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버를 잡고 천천히 돌려서 추출된 커피를 섞는다. 커피의 향과 빛깔이 모두 만족스럽다.


커핑을 위해 로열 알버트 웨지우드 터콰즈 찻잔을 쟁반에 세팅해서 창밖이 보이는 티 테이블로 가져간다. 비취색의 빈티지 찻잔에 최고의 명품 커피를 따른다. 햇살이 투과한 검붉은 와인빛이 고혹적이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커피 맛에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심플한 블랙 원피스로 갈아입고 테이블로 돌아온다. 피트한 실루엣이 통창에 반사된다. 오늘 콘셉트는 '고혹적인 힐링타임'이다.


우아하게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고 천천히 혀를 돌린다. 톡 쏘는 산미가 느껴지는 순간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두 모금을 마시자 아로마 향기에 기분이 가뿐해지고 물먹은 스킨답서스처럼 온몸의 세포들이 싱그럽게 살아난다. 세 모금을 넘기자 너티한 밀도감이 느껴진다. 뭔가 가득 채워지는 기분에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집안은 커피 향으로 그득하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쾌적하다. 무엇보다 위층이 고요하다. 잠시지만 평화를 쟁취한 고무망치의 위력에 묵념을 올린다.


완벽하다. 살 것 같다. 하지만, 맛있는 커피를 음미할 때처럼 순삭 되는 시간도 없다. 어느새 빈 찻잔 속에 남은 여린 꽃향기에 코를 박고 중얼거린다.


아쉽다!


벌써 내일의 힐링타임이 기다려진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싱글오리진을 마시기 시작한 지 5년째다. 로스팅 홀빈 200g을 구입하면 10일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달 동안 나의 커피 소비량은 600g이다. 그래서 커피만큼은 명품으로 구입한다. 카페에선 절대로, 절대로 커피를 사 먹지 않는다. 뭘 섞었는지 알 수 없는 블랜딩 커피는 솔직히 내 취향이 아니다.


언젠가 송이가 입원해서 이틀밤을 병원에서 보냈을 때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서해안을 잠식한 미세먼지가 점점 밀도를 높여가자 어린이집에서 안내문을 보내왔다. 호흡기 질환이 발생할 수 있으니 마스크를 준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기침을 시작한 송이는 다음 날 병원에서 처방한 약을 복용하던 중에 천식발작을 일으켰다. 구급차에 실려갈 때 송이는 얼굴뿐 아니라 손톱까지 푸르게 질려있었다. 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나는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이 옆에서 밤을 새웠다.


송이가 조금 회복되자 피로가 몰려왔다. 병원식당이 있는 지하에 입점한 카페에서 커피를 샀다. 정신을 깨우려고 한 모금 마셨다가 화장실로 달려가서 뱉어버리고 수돗물로 입을 헹궜다. 타이어 가루에 담뱃재를 섞어놓은 듯 끔찍한 맛이었다. 병원 화장실 수돗물의 염소 소독제보다 입안에 남은 커피가 더 역겨울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한 날이었다. 그 후로 카페 기피증이 생겼다. 내가 싱글오리진 중에서도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을 고집하는 이유다.


송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씻기고 나면 재워야 하는데, 아파트로 이사한 후로는 육아패턴을 유지할 수가 없을 정도로 시끄러워 아이도 나도 안정을 잃었다. 위층을 떠올리자마자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 가족이 어쩌자고 공동주택에 이사를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대여섯 살 된 사내아이 밑으로 남매 쌍둥이가 있다.


규원이라고 부르는 큰 애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하루 종일 말썽을 피우는 쌍둥이도 시끄럽지만 큰애가 돌아온 오후 시간엔 정말 아수라장이다. 나이는 세 살이라 해도 겨우 두 돌이 지났을 뿐이라 어린이집에 맡기는 게 안쓰럽다는 것이 위층 여자의 변명이었다. 아이들의 인성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남에게 위탁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자기의 자식 문제엔 그렇게 상식 있는 인간이 아래층 아이가 받을 피해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삼킨 밥알이 곤두설 만큼 분하다.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말이 통했다면 고무망치를 두드렸을까. 이사한 첫날부터 조용한 날이 하루도 없었지만, 그래도 며칠은 이를 물고 참았다. 위층은 나보다 1주일 먼저 입주했다. 입주청소 하는 날 위탁업체에 맡긴 청소상태를 확인하려고 잠깐 들렀다가 우연히 위층 여자를 만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여자가 나에게 704호 입주자냐고 묻더니 자긴 804호라며 소개했다. 그리곤 묻지도 않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날이 입주 첫날이라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일주일 후 내가 입주하던 날, 대강 짐정리를 해놓고 송이를 데리고 나가 저녁을 먹고 들어왔을 때 윗집이라던 그 여자가 찾아왔다. 쟁반에 냄비를 얹어서 들고 있었다.


“이사하느라 고생하셨죠? 힘들고 정신없을 것 같아서 저녁 준비하는 길에 조금 더 했어요. 삼계탕이에요.”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예의를 갖춰 거절했다.

“아, 우린 지금 식사하고 들어왔어요. 감사한데, 그냥 가져가세요.”

“이렇게 거절하시면 준비한 손이 부끄럽잖아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하는 건데요.”

여자가 물러서지 않고 한쪽 다리를 들어 쟁반을 받치고는 냄비 뚜껑을 열어 보여주었다. 다리가 묶인 커다란 닭이 뿌연 국물 속에 들어있었다. 딱 봐도 엄청난 양이었다.

“이거 너무 많아서 어차피 다 못 먹어요.”

“삼계탕은 놓고 드셔도 돼요. 토종닭으로 만들어서 맛도 괜찮을 거예요. 어서 받으세요.”

사양을 하는데도 자꾸 권하는 여자가 난감했다.

“우린, 만들어놓은 음식은 안 먹어요. 애 아빠가 출장 중이라 어차피 먹을 사람도 없고요.”

여자는 알겠다며 쟁반을 가지고 올라갔다.


이유 없이 받아먹는 것도 찜찜하고, 받아놔도 결국 버리게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삼계탕이라니. 살이 남아돌아도 괘념치 않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처럼 식생활 관리가 철저한 웰니스족은 취급하지 않는 품목이었다. 다른 사람 입맛은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들이대는 윗집 여자 때문에 쓸데없는 실랑이를 하고 기분까지 구긴 날이었다. 1일 2식에 생활 쓰레기 제로 식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엄정한 식재료 관리가 필요한지 따위엔 관심도 의식도 없는 종자임을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날 밤, 새 집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밤이 늦도록 드르륵거리는 바퀴소리가 났다. 윗집에서 아이들이 장난감 말이라도 타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님이 온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음은 날마다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한밤중까지. 삼일 밤을 그렇게 보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결론지은 나는 인터폰으로 아파트 관리실에 항의했다.


잠시 후에 거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입주민 중에 어린아이가 있는 가구에서는 놀이기구 등의 바퀴소리가 나지 않도록 층간 소음에 유의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다시 전화해서 저녁 9시 이후엔 주의하도록 다시 안내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거듭 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내 말대로 9시라고 시간을 명시하는 대신 심야의 취침시간엔 주의하라고 했다. 물러터진 표현에 속이 부글거렸다. 똑 부러지게 규정을 제시하기보다는 비굴하게 부탁하는 말투가 거슬렸다. 하지만 그날은 층간소음 문제를 단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전달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얼마 뒤 윗집 여자가 추어탕을 끓였다면서 가지고 왔다. 이름만 들어도 목이 근지러웠다. 나는 솔직히 먹지 않는 음식이라고 밝히고 돌려보냈다. 자기 딴엔 그게 무슨 화해의 제스처인 모양인데, 내 식성이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뻔뻔한 표현이라 더 괘씸할 뿐이었다. 미안하면 차라리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행실을 고쳐야 도리가 아닌가! 일방통행이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었다.


내가 괘씸해하거나 말거나 위층 아이들의 소음은 날마다 진화했다. 무언가 깨지거나 부딪치는 소리, 무언가를 던지는 소리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당하고만 살 수는 없어 소음측정 앱을 깔았다. 그리고 날마다 녹음했다. 나중에라도 딴소리 못하게 착실히 증거를 모아놓기로 했다. 녹음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늘만큼의 위로가 되었다. 그러다 그 일이 일어났다. 급기야는 인터폰을 들고 직접 따져 물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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