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웰니스족 1> 10.내 삶의 비밀한 성역

- 웰니스아파트 704호

by 힐링가객

늦은 밤이다. 윗집의 물소리도 그쳤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당황한 적은 없었다. 나는 본래 뭐든 내가 선택하고 주도해야 직성이 풀린다. 요즘 들어 내가 계획하거나 의도하지 않은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이 아파트에 입주하고부터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이게 다 윗집을 잘못 만난 탓이다. 이런 시간에 VIP를 소환할 기분은 아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서해 바다에 근접한 새로운 주거단지로 입주하게 될 거라곤 나 자신도 예상 못했다. 급하게 진행이 되었지만 그 역시 내가 계획하고 진행한 일이었다. 그렇다. 나는 서울을 버렸다. 내가 활보하던 종로와 성장기를 보낸 삼청동을 버리고 서해로 떠나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나는 특별시민에서 직할시민으로 강등되는 길을 선택한 거였다. 때문에 솔직히 지금 이곳, 웰니스아파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더 당황했는지도 몰랐다.

송이의 하원시간에 맞춰 나갔다가 슈퍼에 들른 것이 화근이었다. 샐러드용 새싹과 파프리카를 계산하고 있는데 참견하기 좋아하는 슈퍼집 여자가 요즘은 조용하냐고 물었다. 전에 윗집 아이들이 베란다에서 물장난 하던 날 멈추게 하려고 내가 창밖으로 냄비뚜껑을 부딪친 후부터 나만 보면 알은체를 했다. 말은 많아도 내 고충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이라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윗집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 그 여자한테 들어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슈퍼집 여자에게 소음분쟁 조정위원회에 접수할 계획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계산대로 다가온 여자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고 나왔다. 나랑 딱히 상관이 없는 사람을 자세히 보지 않기 때문에 여자의 수박색 원피스와 흰 샌들만 기억에 남았다. 우연히 우리 대화를 들었거나, 아니면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원차량에서 송이를 데리고 슈퍼 앞을 지나오는데, 흰 샌들의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가 반색을 하면서 슈퍼에서 나오더니 내 손을 잡고 있는 송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여자의 얼굴이 낯익었다.

“딸인가 봐요?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여기 살아요?”

그제야 기억이 났다. 시현이의 친구였다. 하지만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현실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해서 인사를 얼버무리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여자의 말소리가 따라왔다.

“저기 반가웠어요. 저는 후문 쪽 12동에 살아요. 나중에 한 번 뵈요. ”


여자를 만나고 들어와서 저녁 내내 갈팡질팡 했다. 송이를 찬찬히 살펴보던 여자의 눈길이 신경 쓰였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내가 누군가를 기억해내야 한다는 건 고역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미궁에 부칠수는 없을 것 같은 찜찜함 때문에 터널같이 희미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시현이와 J의 연주회에 갔던 날 여자를 처음 만났다. 그들은 모두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J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 한두 번 어울린 적이 있었다.

여자와 친척뻘이라는 말을 J에게 직접 들었다. 동갑인데 생일이 빨라 집안 어른들 앞에선 누나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래서 실제로도 누나 노릇을 할 때가 있다고. 소꿉시절부터 엄마들이 만날 때마다 같이 놀아서 남매사이나 다름없다고 했던가. J에게 듣기 전까지 격이 없이 대하는 여자를 오해했던 기억도 났다. 그 뒤론 여자를 의식에서 지워버렸지만. J의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 마주친 것이 여자를 마지막으로 본 거였다.

여자의 이름이 생각났다. 민아. 시현이가 소개시켜 줄 때 미나로 알아들었는데, 시현이의 메시지를 보고 민아가 여자의 이름인 걸 확인했다. 여자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도 있었다. J의 스케줄 때문이었던가.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단말기를 여러 번 교체해서 전화번호는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민아라는 그 여자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였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J를 떠나면서 그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과의 인연도 강제종료 해버린 나였다. SNS계정도 비밀로 돌려놓고 피드가 노출되지 않도록 차단했다. 그러고 나니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지 않게 되었고, 지금은 가끔 지인들의 게시물을 엿보는 정도가 된 거였다.

어쩌면 내가 너무 성급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엄마를 향한 J의 우둔한 집착에 질려있었다. 만날 때마다 J는 나만 곁에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J는 엄마만 곁에 있으면 될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질린 이유는 그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데 있었다. 한 번 회의감이 들자 돌이킬 수 없었다. J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실존적인 문제였다.


당시 J의 엄마는 불굴의 의지로 위기를 넘기고 점점 더 신체의 기능들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으로 회복된 예는 없다는 것이 의사의 진단이었다. 덕분에 뇌졸중이라는 질환에 대해 의도치 않은 지식을 얻었지만, 알면 알수록 암담할 뿐이었다. 엄마가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나는 J의 기쁨에 진심으로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나중엔 표정을 관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었다.

그 즈음 외사촌 오빠의 결혼식에 갔다가 이모와 오빠의 제안으로 남편과 소개팅을 하게 되였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갈등이 많았던 시기였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J에 대해 이야기했다. J의 형편을 털어놓자 오빠와 이모가 펄쩍 뛰었다. 그리고 둘이 약속이라도 한듯 똑같은 충고를 퍼부었다.

“니 나이를 생각하렴. 사람이 미래가 있어야지, 그러다 몇 년 훌쩍 지나간다. 세월 보내고도 달라지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여자뿐이다. 얼른 정신을 차려라.”

마치 두 사람에게 엄마가 빙의한 것 같았다. 이모와 오빠는 현실적으로 나를 위해 충고해줄 수 있는 유일한 친척이었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촌오빠가 소개해준 사람, 그가 지금의 내 남편이다. 오빠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으니, 능력과 인간성은 오빠가 검증하고 보증한 셈이다. J와 헤어지고 이태리 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곧바로 남편의 제안을 받고 차박 여행을 갔던 것도, 프러포즈를 받자마자 결혼을 강행할 수 있었던 까닭도, 유일한 친척인 이모와 사촌오빠가 내 등을 떠밀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널 시집보내고 가서 마음 편히 네 엄마 만날 수 있겠다. 소미야 야무지게 잘 살아야 해.”

돌아가시기 전에 이모가 내 손을 꼭 잡고 이야기했다. 부모님이 없는 내가 J와의 인연들을 배재하고 진행한 결혼식엔 하객이 없었다. 하지만 이모와 사촌오빠가 본 적도 없는 친척들을 총 동원해서 자리를 채워주었다. 결혼 전에도 후에도 만난 적이 없는 친척들을. 우연히 마주쳐도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을. 그렇게 극적으로 가정을 이뤄냈는데,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어둠이 나를 향해 사방에서 몰려오는 것처럼 불길하다.


생각이 많을 땐 몸을 피곤하게 하여 시끄러운 뇌관을 강제종료 해버리는 것이 방법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즉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거실에 나와 요가 매트 위에 짐볼을 놓고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생각에 빠져있었을 뿐인데 목과 등이 뭉쳐버릴 수도 있다니 인체가 참 민감하다. 매트에 앉아 짐볼에 등을 기대고 양팔을 들어 올린다. 굳어있던 어깨가 걸리면서 뻐근하다. 팔이 유연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억지로 진행하면 더 뭉칠 수도 있다. 과격한 스트레칭 대신 짐볼 위에 누워 등을 이완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짐볼의 불룩한 배위에 누워 훌쭉하고 힘없는 몸을 늘어뜨린 채 볼이 밀리지 않도록 발바닥으로 바닥매트를 딛는다. 둥둥 물위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대로 눈을 감는다. 생각이 이어진다. 인위적으론 끊을 수 없는 것인지, 불가항력이다. 송이를 찬찬히 살펴보던 여자의 눈빛이 마음에 걸린다. 나의 인연들을 정리해서 하객도 부르지 못하고 초라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렇게 구축하고 지켜온 내 삶의 성역이 비밀에 부쳐질 수 없는 걸까?

고백하건데, 나는 한 번도 J의 사랑을 의심한 적 없었다. 나 또한 J를 향한 사랑을 다른 무엇으로 바꾼 적 없었다. 그랬는데, J와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다시 생각해도 우리 사이의 균열을 만들어낸 건 J의 어머니였다. J는 생각보다 미련해서 어머니가 장기요양보호시설로 들어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모든 걸 치료비로 쓸어 넣었다. 최고의 병원, 최고의 의료진, 최고의 간병인, 최고의 회복실. 지금 생각하면 J는 경제력에 관해서는 현실감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사람은 언제나 최고 등급을 누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가 현실을 감각한 것은 모든 걸 치료비로 써버리고 다급하게 레슨을 시작한 뒤였다. 내가 J의 상태를 인식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J는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라는 노랫말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니, 유일한 재산이 하나 있긴 했다. J의 연주자로서의 비전을 위해 그의 엄마가 투자한 비올론첼로와 그에 맞먹는 명품 활이었다. 그 악기를 메고 노래마당을 찾아다니며 살아가는 베짱이의 삶이 J에게 정해진 운명이었다. 내 눈에 빤히 보이는 너무도 명백한 결론이었다.

그랬던 J가 재기했다니! 사람의 운명은 이래서 알 수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내가 지금 불행한데 J가 행복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아니 J가 행복한데 내가 불행하다는 것이. 지금 J가 행복할 수 있는 건 송이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송이의 존재를 감춰주었기 때문에, 재기하고 결혼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J의 섬세한 보살핌을 받고 있을 피아니스트는 누구일까. 솔직히 질투가 난다. 알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격돌한다. 피아니스트의 스케줄을 찾아본다. J의 연주회만큼이나 그녀의 연주회를 보고 싶다. J의 비밀이 알려지면, 송이의 존재가 알려지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송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멈춘 것처럼 숨을 쉴 수 없다.

다시 생각해도 송이를 포기할 순 없다. 송이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송이의 행복을 위해 나는 이 비밀을 지켜내야만 한다. 송이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J, 송이의 얼굴에 새겨진 J, 그러나 송이의 존재를 모르는 J를 지금까지 그래왔듯, 아니 그보다 더 무거운 의지로 밀어낸다. 밀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마음을 정리해도 여전히 복잡하다. 아니 오히려 곤혹스럽다. 내가 구축한 이 비밀한 성역 안에서,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전, 내가 결정한 내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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