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소설 5회차입니다. 연결된 서사의 이해를 위해 이전에 발행한 1~4회차 연재 글을 보시면 소설의 흐름을 더욱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 https://brunch.co.kr/@healingsiinger/50
하원한 규원이의 머리에서 시큼한 땀내가 난다. 손을 씻으라고 욕실로 보내놓고 만들어놓은 과일젤리를 꺼낸다. 며칠 전에 만든 양갱과 번갈아 먹이려고 두어 시간 전에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 것이다. 탱글탱글하게 잘 굳은 걸 보니 과일주스 500ml에 한천 한 수저의 비율이 딱 맞은 모양이다. 칼이 들어가자 소리없이 잘린 젤리의 색감이 예쁘다. 오홋! 혼자 보기 아까워 마음껏 감탄한다. 컬러테라피가 별건가. 잘 익은 청포도와 수박 키위 파인애플을 적절한 크기로 잘라 넣었더니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손잡이가 있는 시리얼 볼에 자른 젤리를 나눠담는다. 벌써 시원이의 반응이 궁금하다. 녀석은 나로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간식을 시도하게 만드는 기쁨의 원천이다. 특히 신과일을 처음 맛봤을 때 진저리를 치면서 온몸을 흔들던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폭소가 터지는 자동반사 기억버튼이다. 차가운 과일 양갱을 맛봤을 때는 감전이라도 된 듯 두 주먹을 꼭 쥐고 진저리를 쳤다. 싫어서 그러나 싶었는데 맛이 마음에 들었는지 두 손으로 촉감놀이까지 하면서 접시를 비웠다. 쟁반에 스푼을 챙겨 담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위층 언니다.
“규원엄마, 지금 바빠?”
“왜요 언니? 뭔 일 있어요?”
“내가 정신을 놓고 사나봐. 렌지 불을 안 끄고 나온 것 같아. 혹시 우리 집 확인 좀 해줄 수 있어? 비번 알지? 미안한데, 빨리 부탁 좀 할게. 미안해.”
다급한 언니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떨렸다. 치과에 간다고 들린 지가 1시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언니네 집에 벗어놓았던 시원이의 옷을 빨아서 가져다주고 호영이 호민이가 도착할 시간이라며 바로 나갔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렌지를 켜두었다면 큰일이었다. 아이들은 방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준비한 간식을 방으로 가져다주고 규원이에게 동생들과 먹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현관문을 살짝 열고 나와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닫는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아니, 물청소 후에 젖은 시멘트 냄새인가? 담배연기 잔내인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언니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간다. 매캐한 연기를 상상했지만 탄내는 나지 않는다. 주방의 렌지는 꺼져있고, 흠잡을 것 없이 정리되어 있다.
그럼 그렇지.
순식간에 긴장이 풀어지면서 낯선 정적이 느껴진다. 언니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 양수냄비 뚜껑을 열어본다. 사과 당근 양파에 다시마와 양배추 심까지 뻑뻑하게 넣어 끓여낸 채수가 아직도 따끈하다. 표고버섯에 양파 껍질과 파뿌리까지 들어있는 언니의 비법육수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과연 육수의 여왕답게 재료 사용도 알뜰하다. 속을 편안하게 하는 이 채수는 수재비나 잔치국수를 말아먹기에 진국이다. 육수에 진심인 언니의 대표 요리는 다양한 버전의 샤브샤브지만. 군침을 삼키며 얌전히 뚜껑을 닫아놓고 언니네 집을 나온다. 휴대폰을 가지고 왔으면 바로 전화를 해주는 건데, 확인이 급해서 두고 왔다. 슬리퍼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내려간다.
- 규원엄마 그냥 신경 꺼. 혹시 그 여잘 감독관으로 임명한 건 아니지? 그렇게 일일이 신경쓰다보면 그 여자한테 조종당하는 거야. 스트레스 받으면서 그럴 필요 없잖아. 신경을 아예 켜지 않는거야. 작동중지!”
통로에서 조용히 해달라던 아래층 여자의 부탁을 전했을 때 언니의 반응이었다. 내 얼굴을 민망할 정도로 빤히 들여다보면서 언니가 말했다. 평소처럼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언니의 진심이 느껴졌다. 아래층과 이야기를 나눠 볼 테니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내라는 남편에게 소리까지 지르며 언쟁을 했던 날이었다. 한숨을 쉬고 생각해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맞는 말인데,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부터 갑갑해지는 걸 어떻게 꺼야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내 마음 속에 있는 분노와 피해의식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언니는 화 안나요? 우리 아이들 비방하는 거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는 거고요.”
“화 안나. 한심한 요구에 왜 화를 내야 돼? 화도 아까워. 무시하는 게 답이야.”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렇게 반응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명쾌한 결론이었다. 무가치한 참견은 접수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유연해 보이는 언니지만 의외로 단단한 면이 있어서 의지하게 되는 거구나 싶었다.
규원이가 있어선지 먹을 것이 있어선지 아이들이 조용하다. 가만히 문을 밀었더니 시원이가 손가락으로 부서진 과일을 집어 스푼에 올려 담고 있다. 그걸 입으로 가져가다 떨어뜨리자 멈추지 않고 또 담아서 올린다. 세 번, 네 번 반복해야 한 번 성공이다. 도구를 사용하면서 적응해가는 시원이를 볼 때마다 목으로 뜨거운 것이 넘어간다. 저 애가 숟가락질을 배우면 그 때는 어린이집에 보내도 되려나? 규원이와 지원이의 그릇은 알뜰히 비워져있다. 시원이에게 칭찬을 해주고 간식 자리를 닦아낸다. 아쉽게도 시원이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쟁반을 가지고 나와 휴대폰을 보자마자, 샛길로 빠졌던 기억이 번쩍 들어온다. 노심초사하고 있을 언니에게 전화한다.
“와, 살았다. 고마워. 아까 내 전화 안 받았으면 관리실에 자진신고 할 뻔했어.”
“정리까지 완벽하던데요. 덕분에 비법육수 확인했으니, 언니표 수제비 한 번 먹는 거죠?
“그래그래. 수제비뿐이겠어? 내일 당장 먹자고.”
기연가미연가 하면서도 확실히 끈 기억이 나지 않았단다. 맘 졸였을 언니의 심정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잠들었다가도 확인하러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이 몹쓸 건망증은 어떻게 해야하나?
언니네 같은 이웃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집집마다 평안하기만 한 건 아니다. 시원스런 언니와 대조적으로 형부는 성품이 반듯하고 지나치게 꼼꼼하다. 언니 표현으론 극 소심 A형이다. 그래선지 언니네 부부는 집안에서 전쟁이다. 견실한 대기업 직원으로 평소엔 좋고 또 좋은 형부가 가끔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술주정을 해서 부부 싸움이 일어난다. 술기운을 빌어 집 팔아서 동생네랑 나누자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언니의 속을 뒤집는 거다.
언니의 친정아버지가 늦기 전에 집부터 마련하라고 언니 몫의 유산을 미리 내주어 아파트 분양을 받은 언니 입장에선 가당찮은 일이었다. 언니 말로는 그 동안도 시동생 치다꺼리에 들어간 비용이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사기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드나들면서부터 쭉 그래왔다는 거였다. 형부 입장에선 늘 마음이 쓰여 알게 모르게 동생네를 챙겨왔는데, 같이 어렵게 살 때는 거리낌이 없다가 번듯이 아파트에 입주를 하고 보니, 자기만 혼자 호사를 누리는 것이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같은 날 입주하는 바람에 언니는 ‘웰니스 아파트’에서 첫 번째 사귄 나의 이웃이다. 이삿날 짐을 대강 정리해 놓고 맞춰놓은 시루떡을 찾아다가 3~4호 라인의 가정을 찾아뵙고 인사드렸다. 내 인생에 처음 분양받은 아파트라 앞으로 마주칠 이웃들과 잘 사귀고 싶었다. 미입주 가정도 있었고, 인사는 했어도 1회성으로 끝난 집도 있지만, 그 날 이후 몇몇 집들과 친분이 생겼다. 그 중 604호 할머니는 요즘은 사라진 풍속이라며 반가워했다. 제일 반갑게 맞아준 집이 904호 언니였다. 답례로 초대를 해주어 다음 날 아이들과 언니네 집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고 놀았던 것이다.
우리 세 아이들과 언니네 두 아이들은 하루가 멀다고 만났지만, 남편들끼리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입주하고 두어 달 지났을 때 한 밤중에 언니네 부부사이에 싸움이 났다. 위층에서 난데없는 소란이 일어나자 남편이 뛰어 올라갔다. 부부싸움에 끼어드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다지만 그 순간의 소음은 외면할 수준이 아니라,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도 올라갔다. 형부가 타던 차를 팔아서 동생에게 보내주었더란다. 게다가 보너스 받은 것까지 보내준 걸 들켜서 싸움이 난 거였다. 들어보니,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 호탕한 성격이던 언니는 앞으로 융자금도 갚아야하고, 아이들 교육비도 책정해 놓은 터여서 시동생 문제를 이쯤에서 일단락 지으려고 작정을 했더란다. 당장 이혼하고 내려가서 동생하고 살 건지 가정을 지킬 건지 결정하라고 몰아붙이자 형부가 술김에 식탁을 엎고 방에 들어가 화장대까지 엎었던 거였다. 내가 언니를 달래고, 엉망이 된 집을 정리하는 동안 남편이 형부를 붙들고 나가 1차 2차 술잔을 나누며 거칠어진 마음을 달랬다. 알고 보니 형부는 남편과 동향이었다.
그날부터 형님 아우가 되었다. 불과 반년밖에 안 됐지만 누구보다 편한 사이가 된 것이다. 아들을 둘씩이나 둔 것도, 나이 차가 근소한 것도 두 사람이 친근해지는데 한 몫 했다. 이 아파트에 들어와서 남편이 적극적으로 사귄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앞집 803호 남자였다. 내가 떡을 돌렸을 때도, 삼계탕을 돌렸을 때도, 그저 닦은 그릇을 공손히 돌려주던 그는 추어탕을 가져다주었더니, 어디 식으로 끓인 거냐고 물었다.
“이렇게 맛난 추탕은 첨 먹었습니다.”
빈 그릇을 돌려주면서 윗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이렇게 귀한 것을 번번이 나눠주셔서 저도 자리를 마련해 한 번 모셔야겠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803호 남자는 곧 중요한 이웃이 되었다. 남자를 다시 만난 건 아래층 여자의 히스테리가 폭발한 날이었다. 아이들 놀이공간으로 사용하는 작은 방의 붙박이장 안에는 규원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모아놓은 박스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쌍둥이가 좀 더 크면 사용할 것들이었다. 반투명 플라스틱 박스 안의 물건들을 키가 자란 시원이가 처음으로 발견한 거였다. 트레이의 손잡이가 손에 닿자 무작정 잡아당겼고, 박스가 시원이 몸으로 기울면서 뚜껑이 열려 물건들이 쏟아진 거였다. 쏟아지면서 흩어지는 소리가 왁살스러워 나도 깜짝 놀라 달려갔고, 시원이도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시원이를 달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그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무 막대로 치는 정도가 아니라 욕실이 무너질 정도였다. 호시탐탐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바람에 지원이도 놀라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욕실 문을 닫고 아이들을 데리고 거실로 갔다. 지축이 무너질 것 같은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뭔 힘이 남아도는지 무지막지한 소리가 계속 울렸다. 도대체 무엇으로 치면 저런 소리가 날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욕실 천정에 못이라도 박는 건가? 아니면 욕실을 부수려는가 싶었다. 아래층에 괴물이 사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후에 소리가 잠잠해졌지만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우리 아이들이 내는 소음에 일일 총량제라도 정한 건가? 제 멋대로 기준을 정하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여자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든 이유는 그 날은 더 이상 자극하면 안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어떻게 식물처럼 조용히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약을 먹여 재울수도 없고.
풀 죽은 아이들이 안쓰러워 놀이터에 데려가려고 현관문을 열었다. 뜯어져 나온 실밥처럼 아이들은 칭얼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있을 때, 앞 집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남자가 눈인사를 건넸다. 내 목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창피해서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아저씨의 출현에 시원이가 먼저 울음을 그쳤다.
“시끄럽죠?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아이들이 울 수도 있지요.”
비난이 아닌 것에 마음이 놓였다.
“아이들이 장난감 박스를 엎어서 소음이 좀 컸어요. 그랬더니 아래층에서 욕실 천정을 치더라고요. 시끄럽게 한 건 미안하지만 하도 무섭게 쳐대서 욕실 바닥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애들도 자주 혼내니까 이제 아래층에서 소리가 나면 눈치를 보더라고요. 그래서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려고요.”
"그게 욕실을 치는 소립니까? 메칠 전부텀 우리 집에도 들리던데, 어느 집서 못을 받나 했어요. 안 그래도 오늘은 이상타 했습니다. "
남자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토끼뜀 자세로 앉으면서 말했다.
“얘들아 아저씨랑 놀러 갈까? 맛있는 과자도 사먹고 텀블링도 타고”
텀블링이라는 말에 시원이가 관심을 보였다. 아파트단지 맞은편에 조성된 상가에 다양한 크기의 텀블링 놀이터가 있었다. 남자가 뒷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지원이 앞에 흔들자 두 아이가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지원이도 슬그머니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아이들을 썩 잘 다뤘다. 아무런 어색함도 없이 따라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숨이 나왔다. 얼마나 야단을 치고 방치했으면 저럴까 싶어서. 이웃이라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손에 아이들을 맡겨놓고 궁금해서 앞뒤 베란다를 오가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확인했다. 시중을 들어주는 남자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 날 시원이 지원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왔다.
이사하고 초반엔 솔직히 2주일에 한 번 꼴로 집들이를 했다. 형제가 없는 남편은 지인들의 모임을 살뜰히 챙기는 편이었다. 직장동료와 입사동기, 대학동기, 친구모임, 고향모임, 봉사활동모임 등등, 내 손님으론 친정오빠와 조카가 왔었고, 아직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친구모임이 한 번 있었다. 편안하면 나도 초대해서 대접하고 싶은 이런 저런 인연들이 있지만 가시방석 같아서 생각도 못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는 걸 아래층 여자는 모르겠지만.
남편도 역시 피할 수 없는 모임만 한 거였다. 그 때마다 아래층이 마음에 걸렸다. 양해를 구하려고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내 생각만 하고 내려갈 수도 없었다. 내가 만든 음식을 거부하고 심지어 혐오스러워 하던 여자의 반응에 감정적인 후유증이 없지 않아서다. 내가 걱정할 때마다 남편은 만약 문제를 삼으면 만나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에게 그런 여가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1차는 집에서 식사를 하고 2차는
나가서 끝내고 왔다.
2주 전에 유일하게 모임을 지속하는 내 친구들이 우리집에 방문했다. 결혼 후에도 정기적으로 만나오던 친구들인데 출산 후 모임은 뜸해졌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나 핑계잡고 얼굴 보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기념할 일이 있을 땐 반드시 챙기고 넘어가는 의리 있는 친구들이었다. 쌍둥이 출산하고 병원에 있을 때도 안타까워서 전화로 위로해주고 기도해주던 친구들이었다. 퇴원하고 집에 오자 택배 상자가 쌓여있었다. 친구들이 나를 위해 보내준 단백질 밀키트와 아기용품들이었다. 아기들을 병원에 두고 온 상황에서 친구들의 따스한 챙김에 그만 눈물샘이 터졌다. 힘든 시간을 버티며 눌러둔 눈물이 임계점을 넘긴듯 사무쳤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도 우리 아이들 돌잔치 때였다. 그 때 쌍둥이 반지를 받고 빚진 마음을 갚지 못해서 이번에도 집들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집 장만한 기념이라며 부득불 약속을 잡고 통보를 해온 거였다. 그런 친구들이라 잘 대접하고 싶었다.
거리가 제일 먼 진희가 아들을 데리고 이른 오후에 도착했다. 쌍둥이보다 두 살 많은 진희의 아들 서준이는 오동통하고 밝은 아이였다. 호기심이 왕성해서 쌍둥이의 장난감 뿐 아니라 규원이의 장난감들도 순식간에 다 접수했다. 또 다른 형을 만난 시원이가 제일 신나보였다. 문제는 사내 아이 둘이 만나자 거침없이 뛴다는 거였다. 규원이 방으로 꾸며놓은 작은 방에 거의 쓰지 않는 침대가 있는데, 하필 거기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시원이도 따라서 뛰어내렸다. 친구의 아이를 야단칠 수 없어서 장난감들을 거실로 꺼내주고 방문을 잠가버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소파에서 뛰어내리고 베란다를 쑤시고 다녔다.
상가주택 맨 위층에 사는 진희는 그 건물의 주인이었다. 건물에 노래방과 당구장이 있어서 층간소음을 신경 쓴 적이 없다고 했다. 모임을 위해 준비할 것도 많은데, 일단 어딘가로 나가서 넘쳐나는 사내아이들의 에너지를 소모시켜야 무사히 지나갈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놀이터에서 딱 한 시간만 놀다 오자고 이야기했다. 내 손맛을 그리워하는 친구들에게 얼큰한 낙지볶음과 브리또를 대접하려고 시장 봐 놓은 것이 잔뜩 있었지만, 조리할 시간이 부족하면 음식을 주문해서 대접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진희도 내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 아이들을 챙겨서 나가려고 현관에 섰을 때, 아래층 욕실에서 또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질겁하며 아이들을 몰고나갔다. 사색이 되어 쉿쉿!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진희가 말했다.
“저거 고무망치 소리지?
“망치 소리라고?
“맞아. ‘층간소음복수’ 키워드 치면 나와. 방송도 타고 유명한 건데, 너네 아래층 진짜 개토레이네. 너가 왜 그렇게 전전긍긍하나 했거든. 저거 녹음좀 해 놔.”
그래서 고무망치라는 걸 알게 되었다. 녹음을 할 정신은 없어서 아직 한 번도 하지 못했지만. 그 날 진희가 제안해서 결국 식사는 나가서 먹었다. 다들 소탈한 친구들이라 친구의 이야기에 수긍하고 이해해준 거였다. 뒤늦게 합류한 남편은 마뜩찮아 했다. 하지만 진희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도 큰 걱정을 하면서 위로를 해주었다. 덕분에 아파트 층간소음 빌런과 어린이집 빌런들에 대한 성토를 하느라 정작 우리 이야기는 깊이 나누지도 못했다. 재워서 보내고 싶었는데, 모두 민폐라며 거부했고, 아래층 눈치가 보여서 더 권할 수도 없었다.
렌지소동을 벌이면서 치과에 다녀온 언니가 잠깐 들렀다. 영구치가 올라올 시기라서 충치로 썩은 호민이의 유치를 뽑아냈다고 했다. 마취 치료 후 혀나 볼을 씹을까봐 물려준 솜 때문에 호민이의 볼이 불룩했다. 마취가 완전히 풀려야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만들어놓은 과일젤리를 언니에게 덜어주었다. 야단스러운 언니의 칭찬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규원이가 형들을 따라서 올라가자 시원이랑 지원이도 가고 싶다고 나섰다. 포장을 다 끝내서 바쁘지 않다면서 언니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올라갔다. 조금 한가해진 마음으로 청소나 하자고 마음먹고 소파에 늘어져 있는데 진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신기했다. 생각을 하면 상대방에게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걸까? 진희는 다짜고짜 아래층 여자의 안부를 물었다.
“요즘 망치녀는 잘 지내?”
“망치녀? 그렇게 부르니까 너무 욕 같잖아.”
정말 욕으로 들려서 픽 웃음이 나왔다. 진희도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너 스트레스 풀리라고 일부러 그렇게 부르는 거야. 망치녀는 요즘 뭘 갖고 너한테 시비 터는지 말해봐. 나한테라도 풀어보라고.”
내가 듣고 본 아래층 여자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웃기는 게 뭔줄 아니? 우리 애들이 다 잠들어서 조용한데도 시끄럽다고 하더라. 올라와서 보라니까 거짓말 한다고 이상한 사람 취급까지 했어.”
이야기를 옮기면서 마음이 찜찜했다. 유치한 고자질쟁이, 아니 프로 불평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 편으론 말을 하니까 기분이 가벼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나는 내친김에 그 여자의 말투와 깔보는 듯한 표정들까지 생각나는 대로 진희한테 이야기했다. 멈출 수가 없었다. 위층 언니가 신경 끄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위인은 못되는 모양이었다.
“망치녀에게 계속 고문 받고 있었네. 딱 내 예상대로야. 애들 마음에 멍들고 기죽기 전에 빠져나와라. 다시 시흥으로 돌아와. 살기 좋아지고 있어.”
“그래. 시흥 살 때가 좋았어. 웰니스아파트가 아니라 지옥에 온 것 같아. 여기 와서 알게 된 건데, 살아가는데 사람이 중요하더라. 어떤 사람들의 영향권 아래 있는지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거였어.”
“오, 고생 끝에 득도를 했구나. 맞는 말인 것 같아. 사람이 중요하다는 거.”
“진희 너도 뭔 일 있어? 갑자기 우리 아래층 소식은 왜 물어보는 거야? 내 안부는 안 궁금해?”
“너한테 물어봤자 사실대로 이야기 하겠니? 그 여자 소식을 물어봐야 직접적인 니 안부가 나오지.”
“말 안했겠지. 좋은 소식도 아니고 뭐 하러 이야기하겠어?”
“거 봐라. 내가 귀신이지. 너랑은 입장이 반대지만, 내 동생도 윗집 때문에 요즘 골치를 썩고 있어. 원래 애 하나밖에 없는 집이었데. 그런데 조카를 봐주게 됐다나봐. 사내아이라 너무 시끄럽게 뛴다더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참을 수 없게 뛰는데, 그 때마다 위층 여자가 전화를 하거나 내려온데. 하도 만날 때마다 사과를 해서 자동으로 괜찮다는 말이 나오는데, 막상 듣고 있으면 속이 뒤집힌다는 거야. 근데, 사과를 말로만 하는 것도 아니래. 미안해서 더는 못 받을 만큼 과일을 가져다 준대. 동생이 없을 땐 메모를 써서 현관 앞에 놔둔대. 시골에서 보내준 농산물인데 유기농이라면서 이것저것 나눠주는데, 그 때마다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만큼 숙이며 사과하고 참아줘서 감사하다고 인사치례를 해서 여자만 어른거려도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랜다. 그래서 밤 10시 이후에, 잠 잘 시간에만 조용히 하자고, 그 전에는 서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고 룰을 정했대. 동생하고 통화하는데 니 생각이 나더라.”
진희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 속에 이런저런 궁리와 생각들이 지나갔다. 아래 윗집이 만나서 뭔가 명징한 룰을 정할 만큼 소통이 된다면 더 이상 문제될 것도 없을 거였다.
“좋은 이웃이네.”
“내 동생? 동생네 윗집?”
“둘 다. 말이 통하잖아. 사과하고 싶어도 받아줘야 하는 거고, 소통이 되어야 타협점도 찾는 거잖아. 동생 입장에서 보면 과할 정도로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니까 뭐라고 말할 게 없는 거고, 윗층 입장에서 보면 사과든 과일이든 받아주니 좋은 거지. 내 입장에서는 받아주는 니 동생이 훌륭하다.”
“그래? 그러면 방법을 바꿔 봐. 유기농 뭔가를 준다던가. 뭐 그런 거.”
“그럴까? 유기농산물이라도 구해다 바치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사과를 해볼까?”
“건투를 빈다. 잘 해봐. 망치녀인지 웰니스녀인지 드러날 테지. 유식하면 뭐하니? 소통할 줄 모르면 독불 괴물이지.”
“진희 넌 말도 잘 만들어낸다. 고마워. 내 대신 욕해줘서. 하지만 그만 하자. 괜히 입만 더럽히잖아.”
“아니, 증명이 될 때까진 망치녀라고 부를 거야. 넌 그렇게 물렁해서 탈이야. 니가 까탈레나처럼 표독스럽게 반응했으면 그렇게 못했을걸. 아니면 차라리 동생네 윗집 여자처럼 녹여버리든지.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랬어야 하는 건데. 암튼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더 이상 물렁하게는 굴지 마.”
내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는다. 진희의 경고가 귀에 쟁쟁하다. 난 그렇게 물렁하지 않은데, 다들 그렇게 보는 이유가 뭘까? 마치 내가 만만하게 구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도 되는 듯 말한다. 그럴 때마다 체한 것처럼 마음이 불편하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진희는 물렁하게 굴지말라고 하면서도 유기농산물이라도 가져다 주면서 사과를 하라는 엇갈린 주문을 하고 있었다. 본의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망치녀인지 웰니스녀인지 정체성을 파악하라는 말일테다. 하지만 기분이 묘하다. 결국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는 건데, 주변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관전하려 드는 것 같아서. 이런 걸 관음증이라고 하는 건가?
조용한 아래층 여자의 귓속이 가려울 것 같다. 아래층 여자가 조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오늘따라 조용히 지낸 거다. 지난번 억지를 썼을 때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와 확인을 시켰어야 하는데, 간신히 재운 아이들을 깨울까봐 참았던 게 계속 아쉽다. 지금처럼 아이들이 집을 비웠을 때라면 멱살 아니라 머리채라도 잡고 와서 확증을 시켜줄 텐데.
확실히 내가 정상은 아니라는 걸 알겠다. 아이들이 언니네 집에 올라가 있는 이 시간이 불안할 정도로 안심이 된다는 거. 그러면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이런 순간에도 아래층 여자가 신경쓰인다는 거. 잠시도 그 여자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 생각할수록 마음이 거칠어진다는 거.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거. 오늘은 한 술 더 떠서 진희한테 뒷담화까지 했다는 거. 스트레스가 사람을 망가뜨리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나저나 아래층 여자는 모를 것이다. '망치녀'라는 별명을 획득했다는 걸. 나도 진희처럼 망치녀라고 부를까? 어감이 좋지 않다. 좋지 않은 어감이라 마음에 든다.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 여자가 자초한 별명 아닌가. 두고 보자, 망치녀!
* 연작소설 <웰니스아파트 804호>편을 구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브런치북으로 발행한 1부 '웰니스아파트704호'편을 보시면 연작소설의 서사와 갈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라이킷과 텍스트 공유 및 댓글에도 감사드려요. 더 열심히 쓰고 발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