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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가객 Sep 06. 2023

빛의 각도가 바뀌는 가을    - 가향차의 계절


       

 백마산 방향으로 산책을 나섰다. 음영이 짙어진 그 어떤 느낌이 실내에 머물지 말라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아침부터 쨍한 햇살과 파란 하늘이 딱 가을빛이라 햇살샤워를 놓치고 싶지 았다. 자연치유의 근본인 햇살샤워는 부모님께 권하는 만큼 나 역시 열심히 챙기는 건강 비법이다. 그런데 가을맞이는커녕 여름 기운에 급습을 당했다. 보내버렸다고 생각했던 더위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거였다. 솔직히 반갑지 않았다. 끈질기게 주변을 서성이는 여름이 지루해서 일기 예보를 찾아보았다. 9월에도 한낮엔 30도를 웃돌고, 열대야도 종종 있을 거라고 한다.       


 “가을아 힘내서 밀고 오렴!”     

 

 순간 무형물인 계절을 응원했다. 백마산 아래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와서 그늘이 짙은 아파트 산책로를 몇 바퀴 돌았다. 더위로 숨이 차고 옷이 땀에 젖었다. 운동화를 신은 발도 후끈거렸다.     

 주말에 진행할 북토크를 위해 소설의 배경인 백마산까지 걸어보면서 생각을 정리하자는 마음도 있었다. 마침 가까운 광주지역 도서관에서 제의가 들어와 반가운 마음으로 승낙했다. 1부는 장편소설 『황색점멸신호』 의  내용을 다루고 2부에서는 창작을 원하는 분들을 위한 프리라이팅 기술을 다룰 계획이다.   

       

 『황색점멸신호』는 사회복지사인 민교의 이야기와 지역아동센터에 오는 아동회원들의 사연을 다룬 성장소설이다. 민교의 연애, 민교의 우정도 있지만 우연히 관계가 시작된 컴퓨터수리기사와 외국인 노무자의 이야기가 사건과 갈등의 큰 축을 이루고 진행된다. 사회적 범죄인 피씽을 당하면서 민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만난 인생의 황색점멸신호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면 통과하면서 내적 상처를 딛고 나아간다.         

  

https://brunch.co.kr/publish/book/6337

[힐링가객] [오후 11:49] 깨달음은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온다. -



 소설의 주된 배경은 광주시 곤지암이다. 이 소설을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을 때 공포영화 <곤지암>이 상영되었다.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지역이 공포의 장소로 기억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영화는 곤지암 정신병원을 둘러싼 괴담을 다뤘고 관객 260만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기록을 남겼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지역의 아이들 사이에 곤지암 정신병원을 체험하는 놀이가 유행을 했다. 곤지암 정신병원은 1979년 환자 42명의 집단 자살과 병원장의 실종 이후 폐쇄된 병원이라고 알려져,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소름 돋는 장소’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사뭇 다르다. 환자가 이유 없이 죽어나갔다거나 병원장이 자살해 폐쇄된 것으로 알려진 것은 루머일 뿐이다. 경기도청에 따르면 설립 당시 급수 및 하수처리를 정상적으로 설치하지 않아서 폐쇄되었다고 한다. 병원 이름도 ‘남양신경정신병원’이었다. 병원을 폐쇄한 직후에 토지 및 건물 소유자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건물이 그대로 방치되고, 흉가로 소문이 나면서 괴담의 성지로 둔갑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 사이에선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7대 장소’ 로 기네스북에 선정되었다는 루머도 있었다. 아들도 친구들과 다녀왔다고 해서 그렇게 무섭더냐고 물었더니, 기대하고 갔지만 그저 그랬다고 말했다.      

  

 내가 사는 지역이 부정적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이유는 소문과 달리 팔당댐의 상류인 광주와 곤지암이 너무도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골짜기마다 별장촌이 들어서 있고, 골프장과 리조트 스키장이 들어서 있는 광주시와 곤지암 주변의 경치와 인심은 재평가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조류의 도래지인 경안습지생태공원을 비롯해서 팔당 물안개공원이  나름 홍보가 된 우리 고장의 자랑거리지만, 그 외에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 많다. 걸어 다니는 모든 곳이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국 땅 어디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이 지역에 거주한지도 20여년이나 되었으니 적지 않은 세월이다. 지내는 동안 역사적으로 유래가 있는 곳을 답사하러 다녔다. 고려시대 외척이 되어 세손을 이었던 광주 원군의 본거지도 있고,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사학자였던 순암 안정복의 고장이기도 해서 광주시와 순암의 후손이 그의 정신을 기리며 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멀리 중국의 학자들의 필독서로 읽힐 만큼 빼어난 문장을 남긴 허난설헌의 묘지와,  당대에 왕가를 주무르며 권력을 행사하던 희빈장씨의 생가도 있다.

 임진왜란때 활약한 신립 장군 묘와 서희 장군의 묘도 지척이다. 고찰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백련암이 있고, 천주교 성지인 천진암도 있다.      


 곤지암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신립장군과 연관이 있다. 커다란 바위 옆에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임진왜란 당시 문경새재를 넘어온 왜군을 막기 위해 신립 장군이 열세인 병력으로 남한강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한다. 남한강을 사수하지 못한 죄책감에 휩싸인 장군은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병사들은 신립의 시신을 옮겨오는데 그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곳에 넋고개 라는 이름이 붙여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군의 장사를 치른 직후부터 그의 묘지 가까운 바위 근처에서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누구든 말을 타고 바위 앞을 지나가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꼭 내려서 걸어가야만 했다.     


  어느 날 선비 하나가 같은 일을 당하자 말에서 내려 바위를 향해 “장군의 원통함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무고한 행인들을 불편하게 함은 온당치 못하다”고 꾸짖었다. 그러자 뇌성과 함께 벼락이 바위를 내리쳐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옆에는 큰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현재는 바위만 남아있고 연못은 메워지고 없다. 곤지바위를 기념하며 경기 문화재자료 제 63호로 등록하고 설치한 명판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기이한 것은 갈라진 바위틈에서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바위를 처음 찾아간 23년 전보다 나무는 더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바위가 나무를 잡고 있는 것인지, 나무의 뿌리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도록 바위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카메라에 담기지 않을 만큼 나무가 크고 튼실하다.                 


 오늘 산책을 나갔던 백마산은 신라시대 도선 국사가 멀리서 이 산을 보다가 산세가 마치 백마의 등허리를 닮았다 하여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산등성을 따라가면 마구산(말아가리산)이 나온다. 6.25때 국군과 중공군이 진퇴를 거듭하면서 젊은 피를 흘린 비극의 장소가 되었다. 소설의 초입에서 거론되는 장소다.      


 곤지암천으로 흘러드는 궁평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궁평리와 궁뜰이 나온다. 지명에서 왕궁이 연상되듯이 실제로 국가에서 사폐지(고려, 조선시대에 임금이 내려 준 논밭 - 큰 공을 세운 왕족이나 벼슬아치에게 내려주었다)로 지정되었던 곳이다. 소설 내용 중에 이런 지명들도 잠깐씩 다뤄진다. 주인공 민교가 곤지암 주변을 라이딩 하면서 스토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깊은 애정으로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나눌 북토크라서 더 기대가 된다. 정겹게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힐링가객] [오후 11:55] e606ea4f-1042-4ef5-a604-b96185b9d367.jpg (1025×1025) - https://lib.gjcity.go.kr/upload/editor/e606ea4f-1042-4ef5-a604-b96185b9d367.jpg







 아파트 산책로를 걷다가 원형 벤치에 앉아 잠깐 쉬었다. 오는 계절을 막을 수는 없는지 요란하던 매미소리가 귀뚜라미 소리로 바뀌어 있었고, 나뭇잎에는 이른 단풍이 들고 있었다. 반가워서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에 벼슬처럼 붙어 하늘거리는 단풍잎을 보았다. 봄에 꽃처럼 고운 연둣빛으로 동글동글 싹을 틔우던 계수나무 잎이었다. 바람이 통과하는 길목에 같은 종 여섯 그루가 나란히 심겨져 있었다. 동그란 이파리가 흔들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아침마다 산책하며 즐겨 바라보곤 했는데, 어느새 동전처럼 노랑 빛과 주홍빛었다. 계수나무를 비추는 빛의 각도가 꺾여 가을 특유의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늦더위에 억울했던 마음에 웃음이 떠올랐다. 순간 느닷없이 가향차가 그리웠다. 이른 가을 맛을 기어코 보고 싶은 거였다.         


 가을엔 피아노 연주곡보다 바이올린 연주곡에 정감이 간다. 오카리나와 플루트 연주보다는 오보에나 클라리넷이 듣고 싶다. 그리고 맑은 녹차보다 조금은 묵직한 차가 생각난다. 가을은 숙성된 것들이 입에 붙는 계절이다. 가향차를 떠올리는 순간 혀끝에서 매화향이 피어오른다. 지난 봄 하동에서 매화차를 구해왔을 때 중국에서 구입한 전홍차에 매화차를 블랜딩해서 보관해 둔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홍차에 매화향이 들었는지 궁금했다. 가향차를 마시면 잃어버린 입맛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래야 진짜 가을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홍에 매화를 블랜딩한 가향차 - 수색이 황금색이다. 깔끔하고 구수하며 후미에 매화향이 좋다.



전홍의 쌉쌀함과 구수함에 매화향이 겉돌지 않고 어우러진다. 나쁘지 않다. 아니 먹을만하다. 하지만 역시 겨울을 나야 제대로 숙성된 맛이 날 것 같다. 이대로 먹어버리기엔 덜 숙성된 맛이 아쉬워서 잘 봉해서 묵히기로 한다. 티블랜딩의 매력은 내 손 끝에서 내 혀를 만족시킬 맛을 찾아내는 데 있다. 미각을 위한 과정이지만 심미적 만족감까지 준다. 왜냐하면 좋은 맛의 비율을 찾아내면 많은 차벗들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누군가를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관계 속에서 건강을 지향하는 고상한 취향은 그 자체로 힐링이 되기도 한다.

                       

 중년의 변덕일까? 호르몬의 변화 때문일까? 올 여름은 유난히 길고 습했다. 몸이 무거워 쳐지는 느낌도 있었고, 더위에 입맛을 잃어서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낄 만큼 체중도 줄었다. 식사도 운동도 양보다 질을 생각하며 챙길 필요를 느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종종 우선순위에 대해 생각한다. 늘 가족을 먼저 챙기던 순서를 바꾸어 자신을 먼저 돌보고 챙길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노년에 돌봄을 받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다. 중심을 잘 세워야 오래 버티는 법이다. 내 자리를 지키고 내 몫을 해내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올 여름처럼 덥다는 말을 많이 한 해는 없었다. 추위보다는 더위가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게 여름의 더위란 중복과 말복 사이에 삼사일 찬물 샤워를 하면 지나가는 정도였다. 내 기준에서 샤워란 체온과 비슷한 온수로 해야 개운하기 때문에 나머지 계절엔 늘 따스한 물을 사용한다. 하지만 올 여름의 폭염은 찬물 샤워를 해도 끓어오르는 더위를 식혀주지 못했다. 폭염에 아파트 공용 물탱크의 물까지 데워졌던 것이다. 추위민감증이 있어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쐬면 인후통으로 고생하는 내가 가슴이 탁 막히는 답답증이 올라올 때마다 에어컨의 리모컨을 스스로 찾아서 켰다. 무풍 모드로 에어컨을 켜고 목에 실크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모습은 내가 봐도 코믹하기 짝이 없었다.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덥다고 상상하던 어떤 나라에서도 일찍이 이런 더위는 경험하지 못했다. 한국학 대학원 시절에 공자의 고향인 중국 제남에 갔을 때 셔츠가 젖는 경험을 했었다. 더울 거라고 겁먹었던 필리핀의 3월이나 태국의 4월도 이렇게 덥지는 않았다. 경량 패딩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라비아 사막에 갔을 땐 사막의 캠프에서 오리털 파카를 입고서야 잠들 수 있을 만큼 추웠다.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덥다고 표현하는 말도 심심찮게 들린다. 대구를 대프리카라고 부르는 아들이 태국에 살면서 한국 일기예보를 체크하고 더위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거의 매일 써 보냈다.      


 차 에세이를 쓰면서 5월에 에너지를 충전시키기 좋은 허니밀크티를 소개했고, 6월엔 더위를 식혀줄 아이스밀크티를 소개했다. 그런데 말복이 지나고도 진득하게 달라붙는 더위에 가을이 오긴 올까 의심스러웠다. 웬만해선 차가운 차를 잘 마시지 않는데, 얼음을 만들어놓고, 여름 내내 아이스밀크티를 마셨다. 아쌈차 2킬로를 소비하고 가을을 위한 가향차를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 아쌈차 1킬로를 또 주문하고 받자마자 홍차를 우려 농축했다. 아직은 아이스 밀크 티로 달랠 더위가 남아있는 것 같아서.          

 처서가 지나고 3일간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가향차를 주문했다. 통관을 거쳐야 해서 열흘 만에 배송을 받았다. 홍차에 베르가못 향을 입혀 만든 얼그레이 홍차를 받아들자 마치 계절을 주문하고 가을을 받아 든 것처럼 뿌듯하다.


가향차는 녹차 백차 홍차향료나 과일 꽃잎 등을 첨가하여 향을 낸 것이다. 가향차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인 가향차로는 자스민과 얼 그레이가 있다. 자스민차에 관해서는 이미 다루었기에 첨부한다. 궁금하신 분은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것이다. https://brunch.co.kr/@healingsiinger/28

 홍차에 베르가못 오일을 블랜딩한 차가 얼 그레이다. 가향차 중에서도 너무 유명해서 전세계에 홍차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고, 다양한 브렌드 제품들이 시중에 나와있다. 품질이 좋은 것도 있고, 대중적인 것도 있다. 이 외에도 주로 홍차에 허브잎이나 꽃을 블랜딩하여 다양한 가향차를 만든다. 과일을 넣어 달콤한 맛을 내거나 향신료를 첨가하여 독특한 향기와 약리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9월이 되니 매주 티클래스가 한 두 타임 예약되어 있다. 다음 주에 예약된 뜨게 모임 회원들과의 티클래스에서도 북토크와 차모임을 겸하기로 하였다. 출판사 편집장님과 도서관장님도 오신다. 대단한 독서가들이라, 독서모임과 북토크도 하시고 뜨게 모임으로 친목도 하시는 멋진 분들이다. 그 분들과의 티 클래스에서 얼 그레이를 개봉하여 시음할 예정이다. 이제 몇날 며칠 베르가못 향에 흠뻑 취할 것이다. 기대감에 솜털이 일어설 만큼 즐겁다.     


차를 구하는 마음 안에는 함께 어우러지고픈 욕구와 나눠주고픈 정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차 자리는 혼자여도 즐겁지만 함께하면 더욱 정겹다. 올 가을엔 좋은 이들과 도타운 정을 나눌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 가향차를 준비하는 마음 안에 이미 가을은 무르익고 있다.



즐겨마시는 티브랜드의 가향차들 - 추억이 많은 얼 그레이 홍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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