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빠져 아파트를 몇 바퀴 돌고 나니 급작스러운 피로가 몰려왔다. 이어폰을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그를 스쳐가던 주민들이 들어가 버리자 산책로는 조용했다. 그는 천천히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내는 거실에 있지 않았다. 샤워를 하러 들어간 모양이었다. 별 수 없이 냉장고에서 산미나리 씨앗 우린 물을 꺼내 큰 잔 가득 들이켰다. 독특한 냄새가 목에서 넘어왔지만 생각만큼 역겹지 않은 데다 속이 정말 시원해졌다. 오늘은 생각난 김에 아내에게 또 무슨 공부를 시작했는지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았다.
늘 시간에 쫓기는 그로서는 평소 거실 컴퓨터를 만질 일이 없었다. 오히려 쓸 일이 많은 스마트 폰에 길들어 있었다. 마우스를 건드리니 모니터 바탕화면 보호영상이 사라지면서 문서가 떴다. 제목이 ‘평생교육사 직무분석 - 김의영의 SWOT분석’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름을 써 놓은 걸 보니 아내가 작성한 과제물 같았다. 모니터 상단의 파일명이 ‘평생교육사’였다. 새로 시작한 공부인 모양이었다. 한동안 보육교사를 하겠다고 실습까지 나가더니 그 다음 아내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제 또 평생교육사로 관심이 옮겨간 모양이었다.
그는 아내가 작성 중인 문서를 대강 훑어보았다. 제목 아래 사등분으로 분할된 표의 각 칸에 영어 단어의 약자인 듯 S,W,O,T라고 적혀 있었다. 표 아래쪽에 각각의 알파벳을 제목으로 놓고 작성한 글이 보였다.
S(Strengths) - 내부의 강점
시작한 일은 마침표를 찍기까지 묵묵히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 나의 강점이다. 나로 인해 가족을 걱정시키거나 피해 주지 않기 위해 되도록 나는 혼자 짐을 지는 편이다. 두 아이가 커가면서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아파트 융자금과 생활비, 교육비와 보험료 등을 충당할 수 없어 부업을 하고 있다. 전에 배운 적이 있는 사진 필름 교정 작업이다. 고정 수입이 되지는 않지만, 웨딩 철에는 밤을 새도 모자랄 만큼 일이 많다. 완벽주의를 고집하는 성격 덕분에 일단 맡은 일은 열심히 한다. 또 나는 지적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앞으로 직업 재활에 필요한 국가공인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나는 매일 성장하고 있다. 세상을 보는 눈이나 내 앞에 놓인 생의 발달 과정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인 측면에서 나의 내부 강점이라 생각한다.
W(Weaknesses) - 내부의 약점
나는 산후 우울증을 시작으로 십 년간 수면장애를 겪으면서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많은 경우 할 말을 참는 것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침묵하지만, 어쨌든 나는 말이 없는 편이다. 그래서 무뚝뚝하다고 오해를 받는다. 현제는 우울증 약을 끊었지만, 임신성 당뇨를 앓은 이후 약물 반응으로 비대해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다이어트를 위해 투자를 하자니 비용이 만만찮고, 다이어트를 한 사람들의 후기를 읽어보면 요요현상을 토로하는 내용이 많아 시도하지 못하고, 식사량을 조절하고 있다.
또 나는 현재 자궁 질환을 앓고 있어서 추적치료를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놓고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도우려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활동력 있게 일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복지사의 수입이 너무 적어 그 시간을 들여 일하자면 가계에 도움도 못되면서 아이들을 방치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홀어머니 밑에서 외톨이로 자라면서 방치된 시간이 많아서 나는 생계 때문에 아이들을 방치하는 상황만은 만들고 싶지 않다.
O(Opportunities) - 외부로부터의 기회
나의 경우 외부로부터 원조를 받을 곳은 없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는 정보를 활용하여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래서 안정성과 보장성이 없는 필름 교정 업에서 벗어나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갖기 위해 수년 전부터 취업에 도움이 되는 국가공인 자격증 취득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평생교육사도 취업을 하기 위해 도전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교육비 등 경제적 대책을 만들어야 하기에, 나에게는 직업 재활이 시급하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쪽은 노인평생교육 기관이다. 어차피 뚱뚱해진 외모 때문에 취업에 제약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를 보내면서 많은 후회가 남았기 때문에 노인을 돌보는 일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이와 관련된 정보를 계속 모니터링하고 문을 두드릴 것이다. 직업 재활에 성공해서 경제적 여유를 확보하면 남들이 다 가는 제주도로 가족 여행도 하고 해외여행도 가서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볼 기회를 주고 싶다. 그날이 오기까지 내 삶에 브레이크는 없다.
T(T) - 외부로부터의 위협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적, 외적 위협 요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십 년간 해온 필름 교정 일은 의뢰받은 업체로부터 대략 좋은 평을 받고 있지만, 때로는 악덕업체를 만나 일만 해주고 돈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또 한 가지 문제점은 교정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의 버전이 낮기 때문이다. 요즘은 무료 애플리케이션으로 제공하는 포토프로그램이 워낙 기능이 좋아서 누구나 셀프 카메라를 찍을 수 있고, 질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시점에, 교정 전용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전문적인 차별성을 보유하려면 고가의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데, 경제적으로 대안이 없어 작업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둘째, 위암을 앓았던 친정엄마의 수술 및 입원 치료비를 충당하느라 남편 모르게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은 것이 있다. 매월 원금과 높은 이자를 납부하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다. 필름 교정 수입이 적은 달에는 납기일을 지키지 못해 추심을 받고 있다. 대부 업이 사채업자들처럼 위협을 하는 조직인 줄 알지 못했고, 그 땐 다른 방법도 없었다. 현재 이자율이 조금 낮은 쪽으로 대환을 하려고 알아보는 중이다.
셋째, 큰아이 그룹 과외비를 충당하느라 매월 생활비가 너무 바듯하다. 트럭을 구입하면서 받은 대출금을 갚기까지는 대안이 없다. 파트타임으로 보육교사 보조로 일을 했었는데, 원아 모집이 되지 않아서 더 이상 그런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넷째, 또 나는 몇 년 전 자궁선 근종 판정을 받아 추적치료를 받고 있다. 심한 생리통과 생리 중 과다출혈로 불편을 겪고 있고, 무엇보다 심한 성교통 때문에 잠자리가 고통스럽다. 최근엔 생리가 끝나지 않고 계속되어 검사를 받았는데, 난소 물혹과 자궁경부 염증 진단을 받았다. 자궁적출 수술을 해야 하는데,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게 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위축된다. 험한 화물 운송업을 하면서 가족을 위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남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게 두렵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 봐 걱정된다.
정씨는 여기까지 일고 그만 먹먹해졌다.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방금 읽은 내용을 믿을 수 없는 듯 이미 읽었던 내용을 다시 읽었다. 장모가 위암을 앓았다는 것도 그 때문에 아내가 빚을 졌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일이었지만, 아내가 자궁 질환을 앓으면서 혼자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과 난소 물혹에 자궁경부 염증까지 있어서 자궁적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건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 몸으로 부업을 했다는 것도 까마득히 몰랐다.
밤낮없이 컴퓨터를 끼고 앉아 있는 아내에게 관심을 기울여본 일이 없었다. 아내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건 껍데기에 불과했다. 아내를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고, 특별히 마음을 쓴 적도 없었다. 특별히는 고사하고 일상 속에서조차 진심으로 아내에게 따스하게 대해준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는 오직 아내가 그를 위해 무언가 해주지 않는 것에만 분노했다. 불평을 제조하는 기계라도 장착한 듯 그의 마음속은 늘 아내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문득 사방이 고요해졌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그친 것이다. 그는 지갑과 차 키를 챙겨 들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울고 싶었다. 아내가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내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비판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 동안의 아내의 행동들이 다 이해되었다. 아내가 감당해온 만큼 아내와 가족을 사랑했는지, 그는 부끄러웠다. 무섭도록 담담하게 직업재활을 진행하고 있는 아내에 비하면 정작 병이 든 건 그 자신이었다. 이 모든 것을 그는 급작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마치 개안을 한 것 같았다.
그가 방금 읽은 것은 아내의 일대기와 비밀이었다. 그것은 피할 길 없는 현실을 똑바로 보게 했다. 그는 아파트단지 밖에 멀찍이 주차해놓은 트럭에 앉아 울었다. 생각해보니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내에게서 새끼를 얻고 그 새끼들과 함께 아내의 피와 살을 파먹으며 욕구를 채워왔을 뿐이었다.
아내가 걱정할까 싶어 지방에 일이 잡혀 저녁에 출발하게 되었다고 메시지를 넣었다. 그러곤 차를 몰고 회사로 갔다.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컴퓨터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요행히 그는 적절한 정보를 찾았다.
아내 앞으로 보낼 택배를 준비해놓고. 희부옇게 새벽이 밝아오는 걸 그는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업무가 시작되기 전 출근한 동료들과 협의하여 돌아오는 주말에 금, 토 이틀간의 휴무를 신청했다. 갑작스러운 휴무는 물량을 배분받는 다른 동료들에게 큰 부담을 떠안기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간간이 일을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 때문에 그도 심심찮게 당해본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택배업을 하는 동안 그런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번만은 예외를 두기로 하고 양해를 구했다. 물량이 많지 않을 때라 다행이었다.
점심에 짬을 내어 그는 자기 구역을 이탈해 집으로 차를 몰았다. 회사 로고가 박힌 조끼와 모자를 눌러쓴 채였다.
김의영씨죠?
택배라는 말에 현관문을 연 아내에게 박스를 내밀었다. 아내는 무심하게 박스를 받아서 보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러곤 그의 얼굴을 보았다. 택배만 건네고 돌아서려던 그는 아내를 보는 순간 못이 박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를 알아본 아내도 놀란 눈빛이 되었다.
풀어봐. 늦기 전에 당신한테 직접 주고 싶어서.
그 한마디를 던지곤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왔다. 목이 메어왔다. 이젠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밤새 인터넷을 검색해서 구한 2박 3일 제주도 패키지여행 예매계약 내역서와 그가 쓴 손편지를 소형 택배 박스 안에 넣을 때, 그는 아내의 마음을 위로할 반지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는 없었다. 아내가 허락해주기만 하면, 그토록 원하던 가족 여행을 하면서 아내의 수술 날짜도 잡고 아이들과 가족다운 연합을 다짐하자는 것이 그가 트럭에 앉아 궁리한 거였다. 당장은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이들 학교 문제는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면 될 거였다. 아내의 얼굴을 보고 나니 긴장도 풀리고 나른해졌지만, 힘이 빠진 건 아니었다. 날짜를 지체할 여유도 없는 데다, 아내의 손에 직접 건네고 싶어서 무리한 계획을 세운 거였다. 이탈한 거리만큼을 달려 배달 구역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감정을 다시 느꼈다. 아내에 대한 애정과 일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였다.
그토록 많은 택배를 배달했지만, 택배 기사라는 직업의 정체성을 비로소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아내가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새 없는 글 솜씨로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던 말들이 마음속에서 출렁였다. 알 수 없는 보람과 기대로 그의 가슴은 벅차오르고 있었다.
*단편소설 [택배]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소설집 <도마뱀이 숨쉬는 방>에 실린 8편의 단편소설 중 마지막 작품입니다.
새로운 연재 소설을 준비하는 동안 작가님과 구독자님들께 소식 전하면서 공유했습니다.
깊어지는 가을, 어제보다 행복하고 지난 날 보다 풍요로운 새 날들 보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