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차인처럼 살던 우리 집, 집주인이 되기로 했다

by 역전의기량

엄마가 생각해봤는데,
너한테 화낼 일이 아니었어.
화낼 게 아니라 아빠랑 이야기해서 정해야 되는 문제였는데
엄마가 급했어. 미안해.

갱년기와 사춘기의 한판 대립으로 피곤한 밤을 보낸 날이었다.

3일 운동하면 하루는 새벽 기상을 쉬어주기로 했으니,
양껏 자고 일어나 밥 챙겨 먹고 출근했다.
일을 하며 어제 일을 복기해보니,
상황 정리보다 감정이 앞섰던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화낼 게 아니라
남편과 다시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었다.

갱년기가 먼저 사춘기에게 사과하고,
이제는 육춘기 남편과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했다.





“딸, 어디야?”
“학원. 엄마 나 있다 30분까지 갈게.”
“어디 가게?”
“집에 책 두고 와야 돼.”
“응.”
“엄마 지하철역에 있을 거야?”
“응. 너 나 봤어?”
“ㅎㅎ 엄마 퇴근 시간이니까 거기 있을 거라 했지.”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월급날 외식하는 날로 정한 첫날이었다.
돼지네 가족은 그렇게 모이기로 했다.

예전 같았으면 싸운 뒤 일주일은 말을 안 했다.
말문을 닫고 집 안의 이방인처럼 살아본 적도 있다.
남는 건 해결되지 못한 공허함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상대의 사과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잘못한 부분은 먼저 인정하기로 했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남편은
어제 일이 생각났는지 가방부터 들어준다.
표현은 서툴지만,
자기보다 나와 딸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다.

처음엔 이 사람이 변하길 바랐다.
변하길 바라다 화병 걸릴 뻔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니
조금은 편해졌다.








“뭐 시킬까?”
“소금 두 개, 양념 두 개 주세요.
비빔국수에 소주 한 병이요.”

연일 장사 잘되는 닭구이집.
퇴근 직후라 겨우 자리를 잡았다.

“엄마가 어제 화내서 미안해.”
“그래, 화해하자.”

딸 얼굴을 보고 다시 한 번 사과했다.
눈치를 보던 남편도 웃는다.
마침 도착한 메뉴를 먹으며
분위기는 조금씩 풀렸다.

“딸, 이제 한 달에 한 번씩 외식하자.
다음엔 네가 메뉴 정해.”
“응.”

수술과 치료로 신경 쓰지 못한 시간도 있었고,
우리 집은 그날 컨디션에 따라 식비가 오르내렸다.
그래서 이번에 집에 들어가면서
예산을 정하고, 그 안에서 쓰기로 했다.
오늘은 그 첫 외식이었다




“이사 갈 때 보증금 마련은 어떻게 할까?”
“묶인 주식, 손실 감안하고 팔아야지.”
“우리 집 이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하자.
다른 데 기대지 말고.”
“그래.”
“월급 명세서랑 카드 사용 내역도 보내줘.
오늘 정리 안 하면 밀려.”

저녁을 뽀지게 먹고,
밀크티 한 잔을 앞에 두고 다시 정리했다.




지난달 남은 예산,
이번 달 총수입,
고정비,
변동비,
예비비,
여행경비.

“이번 달 수입은 이만큼.
각 예산은 이 통장에서 빠져.
급하게 생기는 건 예비비에서.
남으면 비상금과 여행경비로 나눠두자.
매달 한 번은 이렇게 복기하자.”

결혼 15년.
남편과 나란히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서로 다른 시간에 살며
달리기에만 바빴다.
혼자 운영하며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얼마 못 가 도루묵이 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내 멘탈이 강해진 걸까.
임차인처럼만 살던 우리 집은
이제 집주인처럼 살기로 했다.

달리기만 하지 않고,
가기 전에 한 번 돌아보고,
그리고 다시 달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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