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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전의기량 Jan 22. 2021

환상 그 이름의 착각

어릴 적 나와 다시 만나다.






두 번째 회사에서 일할 때였다. 

일반 사무 업무를 2년간 계약직으로  일하고   두 번째로 들어간 회사는 회계업무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막내이다 보니 정작 내가 하고 싶고 배우고 싶었던 회계업무는 전체 업무의 일부분을 차지할 뿐  대부분의 일은  일반 사무 업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막내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는 말에   그것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알아볼 생각도 없었고 회사의 방침이라 여겼기 때문에 묵묵히 일을 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른 사람들 퇴근 시간에 나는  본연의 업무를 해야만 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나는 지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내 윗 상사분께  호되게 혼난 적도 있었는데 제대로 마감했는지 알았던 숫자를 모르고 실수해서 넘겨 드려서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받으면서 혼나면서도  왜 그걸 틀릴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주지 못하는 상사에게  서럽고 서운해서 집에 가서 울기 시작했다.  우는 내내  서운 했던 건 옆에서  오랜 시간 묵묵히 일했는데 왜 그걸 몰라 줄까 였다.   그때 이후도 난  내가 한 일에 관해 조목조목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기보다   일을 했고  결국은 달라지는 것이 없는 회사라 생각해서 이직을 결심했지만  아마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 보면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다 알아준다'라는 엄마의 말 때문에  더 열심히 묵묵히 일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 상담사인 존 브래드쇼에 따르면 사랑의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자녀는 자신의 가족과 부모를 이상화한다. 따라서 자신이 부모에게 거부당하고, 버림받고 그리고 지나치게 간섭받는 이유를 자신이 나쁜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보다 자신을 탓하는 것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환상 방어기제는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현실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세 딸들을 때린 아빠 ,  자신도 맞아가면서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을 유지하지 못했던 엄마를 환상 속에서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면서  당장의 정신적 고통은 잊으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남편을 만나 지난 과거는 잊고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도 무의식 속에 나는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늘 남편으로부터 ' 가족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만 안다'라는  타박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남편과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부모님께 잘하는 딸이자 며느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가족 가운데 엄마와 유독 친밀했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남편을 대신해 가장 노릇을 한 엄마가 힘들 때마다  술 한잔 하며 나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어떤 것을 물어보면 살갗게 얘기하는 것보다 툭툭 내뱉는 말을 하다 보니 그 말이 진심인지도 구분이 잘 가지 않을 때가 많않기에 정작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툭툭 내뱉는 말 빼고는 이 세상 살면서 한 번도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툭툭 내뱉는 말이 엄마의 있는 그대로라 여겼기에 엄마가 나에게 사랑한다 말을 하지 않은 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엄마의 표현 방식이라 생각했다.


" 엄마 사랑해" 9살 아이가 나에게 매일 해주는 말이다.   뽀뽀를 해주고  틈나는 대로 사랑해를 얘기해주는 아이가 있어 집안은 활기가 도는데  그 아이는  자기가 꼭 사랑해를 해주면  나에게 묻는다.  


" 엄마도 나 사랑해?"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주 묻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언제 다시 들어도  질문이 생소하다.  가족끼리 자주 보는 친구나  동료라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람 속마음까지 알 수 있을까?   심리학에서 환상은 고통을  잊게 해주는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이지만 지나면 정신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현실과 환상 속을 오가며 적절히 이 두 경계를 잘 인식하면 고통에 대한 훌륭한 방어기제가  된다. 


그러나 현실이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다고 계속 환상 속으로 숨어버리면 결국 현실을 거부하고 정신 분열에 이르기도 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상사가 나를 알아줄 것이라 믿었던 것  그리고 내 가족들에게 사랑한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들 모두가  환상 그 이름의 착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신 분열은  현실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환상 속에서만 머무르려는 상태를 말한다. 가족상담의 선구적 학자인 머레이 보웬은 정신분열을 유발하는  가족은 가족 자아가 미분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상태의 가족은 개별 구성원들의 자아가 서로 건강하게 분리되어 있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뒤엉켜 있으면서, 서로를 구속하는 애증 관계에 얽혀 있다. 가족 자아가 미분화된 가족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종의 가족 최면 상태에 빠진다. 


 어렸을 때부터 장사를 하신 엄마는  집안의 모든 일을 내가 전담해주길 바랬다.  몸은 하나이지만  해야 하는 일은 여러 개였던 것이다. 가끔은 놀고 싶을 때도 있었고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야근을 하고 집에 새벽 12시에 들어오는 날에도 밖에서 장사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  집안일을 하고 자야만 했다.  모든 일은 잘하면 장녀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이고 , 한 번씩 실수라도 일어나는 날엔   '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라고 얘기하는 엄마와 적지 않게 싸우는 날도 많았다.  엄마 나름대로 표현 방식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런 날이 반복될수록 엄마에게 말을 하기보다 혼자서 일을 진행하기에 바빴다.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나 혼자 해야 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고 잘되면 내 탓인데 못되면 남의 탓이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혼자 처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착각은 나라는 사람을 점점 해결하지 못하는 미궁 속에 빠지게 할 때가 많았다. 환상은 언제든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을 때에만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착각 속에 빠져서 자신을 왜곡하기보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가족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장녀이기에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착각보다 못하면 왜 못하는지에 대해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설득시켜야 했었다. 


내 안의 나를 인정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  비슷한 상황은  사람이 바뀐다 한들 달라지지 않는다.

유방암 수술을 하면서  수술 후에 나는 자연스레 집에서 분리되면서 남편을 만났다.   결혼과 동시에  환경은 달라졌지만  이전부터 인정하지 못한 불편한 진실들로 인해  언제나 나는 경직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보고 자란 대로 툭툭 내뱉는 말투와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격한 규칙 속에 가둬진 나는 겉으로는 화목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속 안을 들여다보면 불편함과 긴장 그리고 완벽해야 한다는 불안감 늘 안고 살았다.  내가 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 초초에 살다 보니 혼자 처리하고 남편과 의견 타툼도 많이 있었다.   상의를 해서 풀어나갈 수 있는 일들도  혼자 하다 보니 별거 아닌 일로 싸우게 된 적도 많았다.

환경이 바뀌고 사람이  다르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달라지려 인정하지 않으면 같은 상황 속에서 빠져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것을 반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고 환상 속 착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가족관의 처한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보기보다 지적으로 건강하게 분리되어 있어야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강압적으로 제압하려 하기보다  서로의 선택을 존중하고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혼자 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보다 상황에 맞게  협력하며 조화롭게  풀어나가는 것이 아이의 성장과정에도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존중하며  바라보는 시각부터 달리하는 연습이 시작되어야  자아 존중감 높은 사람이 되기에 쉽지 않지만 나와 가족을 위해  환상 속 착각에서 그만 빠져나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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