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보다 먼저 마주한 각자의 결핍
내 별명은 ‘안길동’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열정 빼면 시체,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나를 보며 지인들은 여전히 신기해하곤 한다. 사실은 멈추면 불안해지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교대근무를 했다. 위에서는 실적을 요구받고, 아래에서는 팀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자리였다. 매달 바뀌는 VMD 콘셉트에 맞춰 밤을 지새우는 일이 반복됐다. 새벽 다섯 시, 매장을 다시 세워놓고 나서야 하루가 끝났다. 위계가 분명한 조직 안에서 나는 늘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더 빨리, 더 완벽하게 해내야만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날이 서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누구보다 씩씩했지만, 속은 늘 녹초에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렇게 6년을 낮과 밤이 뒤바뀐 채 살았다. 피곤할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잠자리에 드는 순간조차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회사를 마치면 또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여유가 생기면 영어와 중국어 회화학원으로 향했고, 관련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어떤 날은 밤을 새워 이태원을 누볐다. 그래도 모자랐다. 독서모임과 와인 모임에 얼굴을 비췄고, 출근 전에는 요가 매트 위에 섰다. 휴가가 생기면 국내든 해외든 가방부터 챙겼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했다.
6년을 통틀어 집에 가만히 머문 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물었지만, 그 움직이고 있어야만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낯선 곳이 주는 설렘만이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가 두 번이나 발길을 향하게 한 곳이 있었는데, 바로 경남 진주의 유등축제였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내가 그토록 지독하게 밖을 돌았던 건, 사실 마음 한구석이 늘 허했기 때문이라는 걸. 자주 가는 한의원 원장 선생님은 내 맥을 짚고는 허허 웃으며 말씀하셨다. "성향상 밖에서 에너지를 다 쏟아붓고 집에서는 방전되는 스타일이네요." 밖에서 에너지를 분출하며 채우려 했던 그 ‘허기’를, 나는 엉뚱한 곳에서 헤매며 채우려 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자타공인 ‘집순이’가 되었다.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보며 묻는다. "너 진짜 안길동 맞아? 결혼하고 변했어. 그 열정 다 어디 가고 집에서 안 나와?" 이유는 단순하다. 이제는 집만큼 온기 가득한 곳이 없고, 이 공간이 내게 주는 안온함이 세상 밖의 그 어떤 자극보다 달콤하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늘 한결같은 남편이 있다. 내가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어느새 슬며시 다가와 드라이기를 건네받아 정성껏 머리를 말려주는 사람. 연애 때만 반짝하던 친절이 아니라, 결혼 후에도 변함없는 그의 손길에서 나는 비로소 안식을 느낀다. 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자기 밥은 뒷전인 채 내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지키는 그를 보며, 평생 나를 지키느라 꼿꼿이 세웠던 내 방어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집에서 요리하지 않던 내가 이제는 매일 앞치마를 두른다. 배달 앱조차 지워버린 채 신선한 재료를 손질해 정성껏 식탁을 차린다. 내가 차린 소박한 음식을 먹으며 "반찬집 차려도 되겠다"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 요리하느라 고생했다며 당연한 듯 설거지통 앞으로 향하고, 가끔은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주말 점심을 뚝딱 차려내는 그의 뒷모습은 그 어떤 여행지의 풍경보다 아름답다. 그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아침엔 아로마 오일 향초를 피워 마음을 이완시키고, 책으로 명상을 하고, 깨끗하게 청소하는 시간조차 나를 돌보는 의식처럼 느껴지는 건 그가 만들어준 집의 '온도' 덕분이다.
지금의 남편은 진주에서 태어난 남자다. 소개팅 자리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에게 고향을 물었을 때, “진주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오자마자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 사투리를 굳이 고치지 않는 그의 주관 있는 모습과, 나와는 정반대인 성향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는 해외여행 한 번 없이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성실하게 돈을 모아 온 사람. 충동적으로 움직이던 나와는 전혀 다른 궤적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부딪혔다. 생활 습관이 아닌 '말투'때문이었다.
언성이 높아지던 어느 날, 남편이 답답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왜 한 번을 안 져주려고 해? 왜 꼭 이겨야만 해? 먼저 사과할 수도 있잖아.”
“이기려고 한 거 아니야. 그리고 이유 없이 마음에 우러나지 않는 사과는 의미 없어.”
“대체 왜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구는 건데?”
“... 내가 나를 지켜야 하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나조차 예상치 못한 말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나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방어를 했던 것이다. 남편은 당황한 표정으로 낮게 물었다.
“왜 아직도 네가 너를 지켜야 해?”
나는 바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서로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각자가 살아온 시간을 처음부터 다시 꺼내놓았다. 쉽게 말하지 못했던 깊은 상처까지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그는 평소에는 자상했지만, 어떤 순간에는 180도 달라져 날을 세웠다.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말수 적은 아버지와 표현이 서툰 어머니 아래에서 자라던 중, 집안 형편이 기울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책임을 배웠다.
그는 말했다. 자신만의 가정만큼은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불안과 침묵이 흐르는 집이 아니라,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집을 만들고 싶었다고. 그래서 더 이를 악물었다. 일찍 서울로 올라와 500대 1의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보다 성취를 먼저 배워야 했던 사람. 손에 쥔 것이 있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반면 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엄마는 "공주"라 불렀고, 표현이 매우 서툴었던 아빠는 어느 날 휴대폰에 내 이름을 "사랑딸"이라고 저장해 두었다. 그걸 우연히 발견했을 때의 기분을 아직도 기억한다. 나는 애교 많고 밝은 아이로 자랐다.
그는 그런 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갈등이 시작되면 전혀 다른 내가 튀어나왔다. 사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랑을 많이 주던 엄마에게도, 가끔은 숨 막히도록 날 선 말투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 모습을 소름 끼치게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 엄마의 날 선 말투를 꺼내 드는 내 안의 아이와, 무뚝뚝한 부모님 아래서 상처받지 않으려 감정을 닫아버린 그의 안의 아이. 결국 우리 부부의 싸움은 현재의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안의 날 선 아이와 그의 안의 외로운 아이, 그렇게 '네 명의 아이'가 서로를 할퀴며 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알았다. 사랑은 단순히 두 사람이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의 결핍과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눅눅한 과거까지 기꺼이 통째로 품어야 하는 일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상대의 화난 얼굴 뒤에 숨어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자, 비난 대신 지독한 짠함과 안쓰러움이 먼저 차올랐다.
우리는 비로소 그 ‘넷의 살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상처를 고치겠다고 덤비는 대신, 그 모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법을. 이제 나는 밖으로 쏟아내던 에너지를 내 안의 아이를 다독이고, 그의 안의 아이를 안아주는 데 쓰기 시작했다.
집은 더 이상 방전되는 곳이 아니다.
우리 넷이 함께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안식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