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몰랐던 아빠와, 사랑을 말해주는 남자 사이에서
우리 집에서 아빠는 벽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단단한 벽.
나는 그 벽 앞에서 자랐다.
사랑보다 두려움을 먼저 배우면서.
아빠는 고지식했고, 가부장적이었다.
가족보다 체면을 먼저 세우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자주 말했다.
“아빠는 밖에서 신발 끈 한 번 제 손으로 묶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 말의 뜻을 나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누군가에게 늘 베푸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남이 계산하기 전에 먼저 지갑을 여는 사람.
그런데 나는 늘 궁금했다.
"왜 그 따뜻함은 밖으로만 향했을까?"
"왜 집안의 우리는 늘 긴장 속에 있어야 했을까?"
아빠와 열 살 차이가 났던 엄마는 가끔 내게 장난 섞인 넋두리를 하곤 했다.
"딸, 나중에 네 살 이상 차이 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마라. 세대 차이 무시 못 한다."
그 말은 내 무의식 속에 깊이 박혔다. 아빠처럼 고지식하거나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겠다는 일종의 ‘생존 본능’이 발동했다.
내가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이유도 사실 그 지점에 있었다. 나와 동갑인 남편은 항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한다. 경상도 남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맙다”, “미안하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아빠와는 달리 나를 알뜰살뜰 챙기는 남편은,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있을 나를 걱정하며 점심시간마다 전화를 건다.
“나 없어도 대충 먹지 말고, 잘 챙겨 먹어야 해. 항상 마음이 걸려.”
아빠라는 거대하고 딱딱한 벽을 경험하며 자란 내게, 남편이 가진 다정함은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가치였다. 엄마의 오랜 조언을 나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아빠와는 전혀 다른 궤적의 사랑을 선택한 것이다. 엄마가 십 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홀로 감내했을 외로움을 보며, 나는 아빠를 더 미워했다. 아빠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그저 자신의 체면과 질서가 더 중요한 사람일 뿐이라고 단정 지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초등학생 때, 아빠는 내 서랍 속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았다. 또래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조차 ‘학생의 본분’을 어긴 것이라며 내 내밀한 세계를 난도질했다. 5학년 때는 말투가 버릇없다며 나와 동생을 차에 태워 어두운 산속 묘지 근처에 버려두기도 했다. 무서웠지만 오기가 생겼다. 증오심이 두려움을 이겼고, 나는 어둠 속에 박힌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 사이의 공기는 돌이킬 수 없이 탁해졌다.
그 상처는 점점 번지면서 가출과 반항으로 이어졌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자는 밖에서 자면 안 된다”는 아빠의 쇠사슬은 여전했다. 대학교 MT조차 마음 편히 가지 못하게 데리러 오는 아빠의 과도한 통제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거짓말의 명수'로 만들었다. 아빠의 눈을 피해 잠시라도 숨을 쉬기 위해서, 나는 살기 위한 거짓말을 늘려갔다. 친구네 집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밤새 수다를 떨거나, 있지도 않은 모임을 만들어 내며 밖으로 돌았다. 집 안의 숨 막히는 공기를 피해 밖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던 그 시절, '안길동'의 역사는 그렇게 아빠의 쇠사슬을 끊어내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결국 아빠가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북경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곳은 내 인생의 거대한 터닝포인트였다. 아빠라는 좁은 세계를 벗어나 마주한 북경은 광활했다. 나를 감시하는 눈길도, 10시라는 통금도 없는 곳.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그 자유 속에서 미친 듯이 부딪힌 덕분에 중국어 실력은 몰라보게 늘었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 역설적이게도 나를 못살게 구는 아빠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떠난 그 길이, 나를 더 단단하고 큰 사람으로 키워낸 것이다.
그러던 대학교 3학년, 아빠가 신장암으로 입원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감정이 거세된 사람처럼 차가운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수술 후 마주한 아빠는 전과 딴판이었다. 독불장군 같던 고집세고 튼실한 몸은 간데없고, 앙상하게 마른 아빠를 보며 미움과 짠함이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아빠는 조금씩 변해갔다. 언제부턴가 생뚱맞게 안부를 묻고 어색한 다정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훗날 내가 친척들을 통해 듣게 된 사실은 나를 더 허탈하게 만들었다. 아빠는 남들 앞에서는 내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딸바보'였다는 것이다.
그 사실이 내게는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화가 났다. 타인에게 줄 그 흔한 인정 한마디를 정작 당사자인 나에게는 왜 그리 아꼈던 걸까. 내가 그토록 애타게 갈구했던 인정을 아빠는 내 등 뒤에서만 풀어놓고 있었다.
내 앞에서의 아빠는 날이 선 '감시자'였다. 시험에 떨어지면 “한 번에 붙어야지, 언제까지 할 거냐”며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고, 이별 후 울고 있는 내게는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냐, 이번에도 실패했다”며 차가운 냉소를 던졌다.
아빠에게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 오점이었고, 나는 그런 아빠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했다. 내가 쓸모 있는 딸이라는 것을, 아빠의 자랑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늘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더 독해져야만 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부녀 관계가 어느 정도 평온해질 즈음, 아빠에게 또 한 차례 전립선암이 찾아왔다.
수술실 앞, 피 마르는 기다림 끝에 마주한 아빠의 얼굴은 원래도 작았지만 더 작아지고, 예전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내 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를 지키기 위해 아빠를 미워해야만 했던 시간들이 아빠의 주름진 눈가 위로 겹쳐 보였다.
마취에서 덜 깬 아빠는 힘겹게 입을 뗐다.
“괜찮아. 그만 가.”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딸의 고생부터 밀어내려는 아빠를 보며, 속으로 ‘여기서도 체면인가?’ 싶어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헛웃음은 이내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짠함으로 변했다. 저 무뚝뚝한 배려가 아빠가 아는 유일한 사랑의 방식임을 이제는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퇴원 후 집에서 회복 중이던 어느 날, 평온한 대화 속에 나도 모르게 진심이 새어 나왔다.
“아빠, 나 아빠 죽도록 미워했던 거 알아?”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빠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 나직하게 대답했다.
“알지. 딸, 생각해 보면 아빠가 그때 참 미안했어. 할 말이 없다.”
그 짧은 한마디에 내 가슴속에 쌓여 있던 25년 동안의 단단한 둑이 무너져 내렸다. 평생을 기다렸으나 결코 듣지 못할 줄 알았던 말. 자신의 과거를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준 아빠가 고마웠다. 그 모진 시간조차 결국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 겪어야 했던 서툰 과정이었음을, 그 사과 한마디가 비로소 이해하게 해 주었다.
언젠가 아빠가 없는 날이 온다면, 나는 미워할 대상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지독했던 미움조차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쿵 하고 울렸다. 미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깊은 연민과 사랑이 차올랐다.
그리고 한 가지가 선명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나는 아빠를 이기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한 번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이였다는 것을.
결국 내가 평생 싸워온 건 아빠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어 발버둥 쳤던 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