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무 이유 없이 손톱을 뜯었을까?

불안의 신호를 '마음의 언어'로 번역하는 법

by 해루아 healua

며칠 전, 예능 프로그램 <이서진의 달라달라>를 보았다. 평소 그의 시원시원하고 여유로운 성격을 좋아했지만, 내 시선이 멈춰 선 곳은 의외의 장면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그는 손톱을 뜯고 있었다.

몹시 불안한 사람처럼.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그 생경한 모습이 꼭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무의식적인 습관 뒤에 숨는다.


내가 믿는 속담이 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의식적인 노력과 좋은 경험을 쌓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생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한다.



어릴 적 친구는 늘 옆머리를 만졌고, 누군가는 눈썹을 집요하게 뽑았으며, 또 다른 이는 작은 뾰루지조차 그냥 두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고, 턱에 힘을 주고, 수시로 휴대폰을 켜고, 다리를 떨고… 문이 잠겼는지, 전원 코드를 뽑았는지 반복해서 확인하는 강박적인 행동들.



그 속에는 ‘단순한 버릇’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감정이 고여 있다. 말로 꺼내지 못한 불안과 초조함이 몸이라는 틈을 통해 새어 나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 패턴이 내면의 ‘걱정 루프’로 이어진다. 같은 생각을 끝없이 반복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을 미리 시뮬레이션하며 미래를 가불해온다. 이미 끝난 일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 역시 일종의 습관이다.



이럴 때 우리는 도피처를 찾는다. 의미 없는 쇼핑에 몰두하거나, SNS의 타임라인 속으로 무작정 숨어버리거나, 단 음식에 집착하며 폭식에 빠지기도 한다.



외형은 제각각이지만 이 모든 행동의 본질은 결국 하나다. 지금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진짜 감정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으려는, 아주 정교하고도 처절한 회피의 방식인 것이다.



습관은 무섭다. 의식하지 않아도 반복되고, 멈추려 해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루틴은 의지로 만들지만, 습관은 노력 없이도 숨 쉬듯 우리를 따라온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에 더 쉽게 길들여지곤 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 습관과 걱정의 노예였다. 지금도 가끔은 그런 습관이 고개를 들곤 한다. 어쩌면 내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반복되는 행동 패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누구나 이런 구석은 하나쯤 있다는 것을.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 저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습관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건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내 몸이 보내는 절박한 '신호'였다. 내 몸은 종종 극단적인 방식으로 반응한다. 컨디션이 무너지면, 손바닥이 가렵고 이내 온몸이 붉게 부어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다.



예전의 나는 그저 나 자신을 탓하며 울부짖었다.

"왜 나만 이럴까?"라고 자책하며 트라우마처럼 반복되는 증상에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병원엔 내가 원하는 답이 없었다. 알레르기 증상은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고, 그저 수액과 처방 약만 돌아올 뿐이었다.



20대 중국 유학 시절, 그 증상이 너무 무서워 한밤중에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건강염려증에 사로잡혀 작은 통증에도 거대한 병명을 검색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나를
충분히 돌보지 못했을 때
몸이 대신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마음이 감당하지 못한 것들이
결국 '몸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들— 임신, 흐르는 시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그 거대한 무력감 앞에서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나도 모르게 손톱을 뜯고, 강박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리하게 운동하며 몸을 혹사했다. 건강에 강박적으로 매달리며 불안을 다른 방향으로 옮겨 담으려 애썼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 믿었지만,
결국 그 모든 행동의 뿌리는 단 하나였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어떻게든 내 손아귀에 넣고 싶었던
지독한 통제 욕구.


지금의 나는, 요가를 통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내 몸과 자주 마주하며 친해지세요.”



그 말을 따라가며, 나는 비로소 내 몸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잘하려 애쓰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시간.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나를 이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끝없이 통제하려 했다는 것을.





작년, 또 한 번 온몸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참기 어려운 가려움이 올라왔던 날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당황하며 병원부터 달려갔겠지만, 그때의 나는 가만히 멈춰 섰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탓하지 않고 나직이 물어봐 주었다.



'아, 지금 내 마음이 몹시 무리했구나.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에게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해줬는지 모른다.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안타까워했지만, 서서히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내 모습을 보며 대견해했다. 사실 남편도 나름의 신호를 안고 산다.



나는 알레르기 외엔 건강한 편이지만, 남편은 조금만 피곤하면 입술에 하얀 수포가 맺히곤 한다. 그럴 때면 나 역시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우리 부부가 서로의 연약함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는 이 신호를 받아들이고 터득하는 법을 배웠다. 억지로 버티지 않는다. 더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잠시 누워 쉰다.



따뜻한 온기 속에서 몸이 다시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정한 안부를 건넨다. 놀랍게도, 그날은 약을 먹지 않고도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내 마음이, 내 몸을 다스린 첫 경험이었다.



과거 손톱을 뜯다 피가 맺힌 손가락을 바라보며 자문하곤 했다.



'왜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일까?'
'왜 아플 때까지 나를 방치해 두는 걸까?'



숨겨두었다고 믿었던 나의 연약함은 결국 몸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들킴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이해하게 만들고, 결국 다시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 못난 순간마저 문장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며 하루를 조용히 갈무리한다.



나쁜 습관을 반복하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몰입하고, 좋은 경험을 쌓는 것.



좋아하는 것에 바쁘게 심취하다 보면, 나를 갉아먹던 습관들은 어느새 끼어들 틈을 잃는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처럼 말이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다른 풍경이 될 뿐이다.

나는 오늘도, 그 이야기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