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빈자리.
추석, 명절 때는 친정 부모님이 안 계시니 친정 큰언니네 집에서 모임을 한다. 그러나 이번 추석 때는 모임을 갖지 못했다. 조카 수업 때도 큰언니가 우리 공부방에 픽업을 오는데 여유 있게 앉아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자매들은 경쟁도 많이 한다는데, 나는 그런 걸 별로 느낀 적이 없다. 언니들의 입장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나에게 경쟁이라는 감정을 느낄 일이 있었을까?
큰언니는 지금이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동생들에게 카리스마가 넘치고 때로는 못된 대장 스타일의 언니였다. 그때는 첫째라면 다 언니 같은 성격을 가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사회복지 수업을 들으며, 첫째는 동생들이 생기면 폐위된 왕의 기분으로 살아간다는 이론이 있다는 걸 알았다. 폐위된 왕이라.. 일리가 있는 말이다.
폐위된 우리 언니는 나에게 아름드리나무 같은 존재일 때가 있었다. 나를 특별히 아낀 것은 아니고, 아빠가 날 일방적으로 혼낼 때 언니는 늘 내 앞에 서서 나를 지켜주곤 했다. 아빠의 심리는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두 분 할머니 댁에서 지내다 본가로 왔을 때 몇 년간 나를 많이 괴롭혔다. 괴롭혔다는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으나, 어린 내가 느끼기에 아빠의 모습들은 괴롭힘으로 다가왔다. 무서웠고, 감당하기 힘들었다.
어느 날은 엄마가 언니에게 혼을 냈다. 아빠가 나를 너무 쥐 잡듯이 잡으니, 비교적 관대한 관심을 받는 언니에게 동생을 좀 챙기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언니는 그 이후 정의의 용사처럼 내가 한 일도 자기가 했다고 말하며 나를 아빠의 괴롭힘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빠가 엄마를 잡을 때도 언니는 최전방 군인처럼 엄마 곁을 지켰다.
나는 예민한 아빠의 성향에 맞추려 노력을 많이 했고, 5-6학년이 되었을 때 아빠도 나만 특별히 잡는다거나 하는 것은 많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언니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어 귀가 시간이 늦으니 나는 아빠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시간이 서로의 성향을 알아가는 과정의 바탕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자식과 부모 사이여도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으니 서로를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나에게 큰 나무였던 언니는 늘 혼자 책을 읽고, 뭔가를 썼고, 그림을 그렸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제야 세대가 맞춰졌다. 언니는 동생들에게 술을 사주기도 했고, 용돈도 주었고, 자기의 것을 많이 나눠주었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주렁주렁 달린 동생들이 언니에게 짐이 되었던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나는 첫째인 게 싫어. 징글징글해.”
언니는 기억에 없을지 모른다. 언니의 취중진담으로 부모의 기대와 장녀에게 주어진 책임감이 언니의 어깨를 짓눌러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폐위된 언니와 왕의 자리에 앉은 어린 남동생은 지금도 대치 상황이다. 큰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작은언니는 자기 연민에 빠져 동굴로 숨어버렸다.
나와 큰언니만 근근이 혈연관계를 이어가는 중이다. 부모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나만의 그리움이 아니라 조각나버린 형제의 마음도 붙이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