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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Aug 11. 2018

아직은 내가 온전히 닫히지 않았을 때

갑각류의 마음

먹는 걸 소홀히 했더니 무게가 조금 내렸다. 복부가 납작하고, 폴(pole)에 올라갈 때 몸이 가벼워서 내심은 즐겁다. 어딘지 새초롬한 데가 있는 즐거움이다. 식욕이 없는 것은 계절이 계절인 탓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37도의 열 덩이로 느껴지는 계절. 나 자신의 체온마저 버거운 계절. 나는 쉽게 불쾌해진다.


아무리 힘을 주어 비틀어도 생수병 뚜껑이 열리지 않을 때.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분이 작정하고 앞을 막아설 때. 전단지를 받다가 손에 들고 있던 체크카드를 떨어뜨릴 때. 내리지도 않을 거면서 지하철 문간에 온 존재로 버티고 선 사람을 피할 때. 구깃구깃 구겨져서 승강장으로 토해져 나올 때.


하루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만 지치고 만다.


아직은 내가 온전히 닫히지 않았는데, 세계는 내게로 와르르 쏟아져내린다. 그런 아침에는 고갈될 줄 알면서도, 체력을 소진하고 만다. 웃음을 방벽처럼 두르고 외부의 침탈을 막아낸다. 몸에서 가장 강한 부분을 외피로 두르고 있는 생물을 우리는 갑각류라 부른다.


연락이 왔다. 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분들이었다. 일이 있어 오셨는데, 온 김에 얼굴이나 보자고 하셨다. 아예 연이 없는 직장으로 옮기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되는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이다.


다른 사람을 세련되게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어쩌면 본인이 그만큼 싫어하는 게 많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런 말을 보며 나를 떠올렸다고. 친구 분을 만나러 우리 동네에 오셨다고. 두 분은 이따금 작은 계기로 별스럽지 않게 나의 안부를 묻고, 담백한 태도로 말을 맺는다. 마음이 힘들수록 속으로 곱아들지 말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웃다 보면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고. 아슬아슬한 순간마다 내가 넘치지 않게 세련된 배려를 보여준 분들은 다름 아닌 그분들인데. 나의 끼니 챙기기를 사명처럼 생각하시는 분들답게 점심과 커피까지 사 먹이고 유유히 세종으로 내려가셨다.


전 직장 분들과 현 직장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는 까닭은 전 직장 분들이 하나같이 좋은 사람들인 덕분이다. 배울 점이 많은 좋은 사람들 곁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 줄 그때는 몰랐다. 업무에 치여서, 부당한 일을 당해서, 어쩌면 개인적인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보이면 직장 동료에 불과한데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까닭은 이전에 내가 그랬을 때 그분들이 내밀었던 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갚을 수 없는 마음들을 내리사랑처럼 기억하며 다른 곳에서라도 실천하려 한다. 그런 마음이 이어져서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또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길 바란다.


스스로의 무게마저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계절이지만, 덜어 내어선 안 되는 것도 있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 공감은 오히려 이런 계절이라서 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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