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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Aug 12. 2018

당신은 좋지만 결혼은 싫다

이 문을 지나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그 사람과 나는 서로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았다. 매일 밤 잠을 희생하면서 몇 시간씩 통화하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아 아쉬워하는. 우리는 그런 종류의 연인이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사건이 모두 그에게 들려줄 이야기로 화했다. 우리의 시간은 웃음으로 반짝였다. 그마저 부족할 때 그는 자정에라도 차를 몰고 한 시간 반을 달려 내게 왔다. 그의 다정함에 자주 구원받았지만, 그런 순간에조차 비겁한 나는 내일을 떠올렸다. 어쩌다 하루 정도야 무리할 수 있지만 매일을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공간을 빈틈없이 공유하고 싶어 하는 여느 연인이 그러하듯 이야기는 때로 결혼으로 귀결되었다. 그 점에서만큼은 그 사람과 내가 결코 한 점으로 소실되지 않았다.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해 단 한 번도 비판적인 생각이나 위화감을 가진 적이 없던 사람에게 어떤 논거를 들어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문제가 설득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주장이 되지 못한 허약한 나의 말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다들 하는 건데 왜 너만 유별나게 구냐는 말은 우리가 건너온 모든 시간을 무위로 돌릴 만큼 파괴력이 강했다. 이해받고 싶어서 건넨 그 많은 이야기들이 오해로 돌아올 때의 낙차는 점차 메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나와 근본적으로 다르구나. 그가 말하는 사랑이 더는 달갑지 않았다.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는 동생도 결혼에 대해서만큼은 회의적이다. 모든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나와 동생이 근본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아주 비슷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친가는 좀 극성스러운 데가 있는 혈족이다. 일 년에 열두 번이었던 제사가 네 번으로 줄고, 그 네 번이 마침내 사라졌어도 이 일족을 이루는 근간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표상하는 모든 것. 같은 항렬의 남자 친척들이 누워서 TV를 볼 때 부엌에서 뭐라도 바지런히 거들지 않으면 죄스러운 기분은 철저히 학습된 것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흥미로운 무언가에 자원을 쏟아부으려 할 때, 우리가 실패하고 다치고 망하고 상처받을까 봐 말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내가 실패하고 망함으로써 그들을 책임지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지는 소중한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족쇄다. 가족이란 대개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포기한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후회로 남는다.

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엄마 나는 결혼이 싫어. 아이를 낳는 건 더 끔찍해. 엄마는 아주 어린것을 보는 안타깝고 슬픈 표정으로 아이는 원하지 않으면 낳지 않더라도, 네 그런 면까지 이해하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 서로 의지하면서 예쁘게 잘 사는 건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네가 아직 그만큼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그래.


그러나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일까? 아직도 신랑 측이 폐백을 받는 문화가 남아있고, 딸 가진 집이 약자가 되고, 여자는 가사와 육아를 하는데, 남자는 가사와 육아를 잘 '도와주는' 것만으로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랑을 해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타인과 함께 있으려면 그전에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내가 누군가와 24시간 생활공간을 공유할 수 있을까? 얼마나 좋은 사람이라야 내가 화장실 변기를 청소하고, 배수구에 있는 머리카락을 치우면서도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내 부모에게도 못해본 살가운 일을 상대의 부모에게서 요구받을 때 성별 임금 격차는 여전한데 부부의 경제생활에서만큼은 치사할 정도로 정확한 5:5의 책임을 나누어야 할 때 아이의 기저귀 한 번을 갈아주지 않을 사람들이 첫째나 둘째를 강요할 때 나는 과연 계속 나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을 속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가보지 않은 경지에 더없는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언제고 나를 나로서 온전하게 하는 선택을 하고자 한다. 정해진 통념과 관습대로 사는 것이 나의 행복과 일치한다면 일고의 의심 없이 그 길을 갔을 것이다. 나는 그저 처절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불행해지기 쉬운 길을 덥석 택할 만큼 강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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