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Hubris

치유될 수 없는 상처에 대하여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by Argo

1.

기분 나쁜 꿈을 꿨다. 드물게 긴 꿈을 꾼 네 시간의 낮잠을 끝내고 어렴풋하게 정신을 차렸다. 조금씩 몽롱함이 사라지면서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생각보다는 감정이 더 먼저였다. 불쾌함.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2.

나는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사용하는 편이다. 어떤 감정이 들었을 때 단순히 그런가 보다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를 생각해본다. 감정의 근원을 찾는 작업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3.

꿈을 꾸고 나서 든 감정이니 꿈과 관련되어 있는 건 분명하다. 잠에서 깨어난지 얼마 안되어 순간적으로, 그리고 직감적으로 나는 이 감정이 꿈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트라우마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4.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한다. 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지만, 나는 꿈을 무의식과 현재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간만에 꿨던 긴 꿈의 전반부는 현재를 반영하고 있었고 후반부는 과거, 내 무의식 속에 긴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트라우마가 그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현재와 과거는 꿈 안에서 동시에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5.

며칠 전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꿈을 꿨던 적이 있다. 비교적 강도는 약하지만 일어나서 기분 나쁨과 짜증, 통쾌함을 느꼈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 상황상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 정리를 하겠다며 책장을 정리하려는 엄마에게 화를 내며 그 책장을 통쾌하게 해체해버렸다. 돈을 줄테니 뭘 하라는 아빠에게 필요없다고, 아빠 쓸 데 많을테니 아빠나 쓰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꿈. 가정 폭력으로 인해 퇴거 조치를 당한 아빠를 안 만난지 1년 반이 넘은 지금에도 간간이 꿈에 아빠가 등장한다. 나는 가끔 전 남편이라는 단어는 있는데 왜 전 아빠라는 단어는 없을까 생각하곤 한다. 이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는 남남이 되지만 자녀와 부모는 남남이 되지 않는 현실이 불만족스럽다.


6.

저번 꿈과 다르게 오늘, 아니 어제 저녁의 꿈은 오로지 불쾌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트라우마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치명적이며 과거와 현재, 미래에도 영향을 미치는 트라우마와 관련된 장소가 꿈에 등장했다. 완벽하게 그 장소가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 부분 그곳과 일치했고 꿈 속에서나 깨어서나 그 장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꿈의 분위기가 한층 다크했고.


7.

이전에도 간간이 그 장소와 관련된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살짝 등장하다 말았을 뿐이었고 구체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저 멀리서 오는 걸 보고 짜증이 나는 정도랄까. 기분이 나쁘긴 한데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을 정도로만 등장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장소의 외형 - 전부는 아니지만 - 과 장소에 담겨있는 감정이 정확히 구현되었다. 그랬기에 나는 이 꿈과 꿈에서 비롯된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를 느꼈다.


8.

침대에 누워 꿈을,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감정을 생각하면서 문득 나는 소설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어떤 것들은 시간이 흘러도 치유가 안 돼,
그렇지 않아?"

리처드 포드의 <독립기념일>에 나오는 이 문장은 내가 줄곧 생각해온 주제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꿈에 대한 숙고 또한 이 문장과 연관되어 있고.


9.

어떤 사람들, 특히 상담가들 중에서 모든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희망찬 메시지이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상처도 상처 나름이고 상처 중에서는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그들의 말은 그저 바람일 뿐, 현실적이지도 않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다.


10.

"트라우마(trauma)는 '상처'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트라우마트(traumat)에서 유래된 말이다.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을 말하며, 보통 후자의 경우에 한정되는 용례가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라우마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11.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상처, 비교적 가벼운 - 상처에서 경중을 따지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에 추상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구체적이지 않을 뿐 대다수가 암묵적인 동의를 할 수 있는 범위는 있다고 생각한다 - 대인관계에서의 스트레스, 상실, 실패 경험들은 상담이나 다른 방법으로 치유될 수 있다. 각종 힐링 도구들 - 맛집 탐방, 여행 등등 - 이 그런 상처들을 보듬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심각한 상처, 트라우마로 남아 "영구적인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가 되지 않는다. 그저 후유증의 크기가 조금 줄어들 수 있을 뿐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 이미 인격과 정체성에 깊게 자리잡아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치유가 아닌 관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나마 나은 접근 방식일 것이다.


12.

꿈에 대한 상념, '직감적인 깨달음'의 마지막에서 나는 내가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이것은 결코 치유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전에도 이런 생각은 줄곧 해왔었다. 내가 심리학과를 선택했던 이유 중에는 어떻게든 이 트라우마를 치유해보려는 시도의 의미도 있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심리학으로 치유가 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없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진실이었고 냉혹한 현실이었다. 나는 이 결말로 인해 비탄에 잠기기도 했지만 역설적으로 마음의 위안을 받기도 했다. "포기하면 편하다"라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이 됐던 것일까.


13.

끔찍했던 기억, 모호한 감정 그러나 강렬하게 남아있는 감정들, 플래시백처럼 드문드문 등장하는 순간들, 어두운 밤 차 안에서 당했던 무차별적인 폭력들. 나는 지금도 차 조수석에 앉으면 그날의 감정을, 조금 옅어진 불안감과 공포를 느낀다. 예전에는 승용차를 타면 자리에 상관없이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대중교통에서는 그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택시도 못탔다. 지금도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내 몸과 마음은 아직도 그날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고 그때 겪었던 공포와 고통, 폭력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이곳저곳에 새겨져 있다.


14.

"모든 걸 바로잡기란 불가능해.
결국 어떤 것들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둬야 한단다."

리처드 포드의 <독립기념일>에 나오는 또 다른 말이다. 시간이 결코 약은 아니지만 - 나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경우에는 그냥 흘려보낼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 불완전한 해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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