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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욕구

by 누구니

올해 들어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사업이 오늘 드디어 개막했다.

잦은 인사 이동과 퇴사, 출산 등을 이유로 지난 해에 같은 사업을 진행했던 직원은 딱 한명뿐이었다.

그마저도 최근 신혼여행을 다녀와 실질적인 참여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경력 1년 미만의 직원들과 장기간 큰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 또한 담당자들이 바뀔 때마다 에너지와 기대가 많이 소진된 탓에 무엇을 가르치고 챙겨야할지...걱정이 많았다.

급기야 지난 주에 2명이 나가고 나서는 업무지시를 하기보다는 내가 직접 나서서 정리하는게 훨씬 빠를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인지, 최근 며칠 간은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얕은 잠에 뒤척일 때가 많았다.


아침부터 충혈된 눈으로 사무실과 행사장을 오가며, 오늘 VIP투어 때 브리핑할 내용 여러번 연습했다.

오후가 되자 개막식과 함께 각 지자체 공무원들과 기자들이 한 곳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드디어 우리 부스 순서가 되자, 나는 침착하게 준비한 브리핑을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가장 중요한 우리가 만든 문화상품을 증정하는 걸 빼먹고 말았다.

뒤늦게 핑크색과 블루색 문화상품을 기관장에게 내밀었다. .

내가 둘 중에 칼라를 고르라고 하자, 그는 "당연히 붉은색이지!"했다.


어색한 증정식을 끝내고 VIP들 한 무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난 뒤, 우리 지자체 공무원들이 단체로 방문했다.

"이제 좀 쉬어야 겠네...여기 마실 것 좀 없어요?"

마치 그들은 당연한 듯이 우리 부스에서 먹을 것을 요구했다.

내가 먹을 것을 건네자 그들은 아까 있었던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농담처럼 말했다.

"오늘 팀장님...파란색 상품을 내밀면 어떻게 해요! 당연히 핑크지 뭘고르라고 해!"

그 옆에 있던 우리 회사 대표는 한술 더 떠서...한마디를 더 보탰다.

"원래 저 팀장은 파란색만 만들려고 했는데...내가 핑크색 만들라고 얘기해서 그나마 만든거야!"


내가 이 행사에 썼던 모든 예산들이 어짜피 그 공무원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긴 했지만, 나는 그 돈으로 시민들을 위해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해 서울과 지역을 수차례 오가며, 전문가들을 찾고, 많은 주민들이 진정한 주체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30종에 달하는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만들었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모여 앉아 문화 상품을 색깔을 정치색으로 취급하자 강한 불쾌감과 지난 내시간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차창 밖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대표에게 사표를 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내가 지금껏 이 고향땅에서 무엇을 위해 애써왔던가?

오직 아이들 옆에 있겠다는 다짐으로 서울에서 하던 뮤지컬 커리어도, 국립기관의 안정된 자리도 포기했었다.

그래도...내 손으로 고향에서 제대로 된 문화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기에 이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내가 마주한 많은 사람들은 '문화'를 정치의 수단으로 보았다.

대규모 축제를 할때도, 유명 가수를 부른 무료 콘서트를 할 때도...그들의 머릿 속에는 '정치'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순응하려 애쓰기도 했고, 때로는 참을 수 없는 반항기로 글로, 칼럼으로 응수하기도 했다.


매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내가 오늘 하루를 잘보낸건지...잘못보낸건지...

지난 시간이 가치가 있었는지...없었는지

어쩌면 내가 가진 '세상을 문화로 바꾸겠다'신념이 이 땅에서는 통하지 않아서 내가 고향을 계속 탈출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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