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의 휴가를 억지로 가졌다.
어디론가 억지로 가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였으나, 아이들은 정오가 가까워지니 각자의 일정으로 집을 떠났다.
엄마인 내가 해줄 것은 운전뿐… 시내에 약속이 있는 딸아이를 데려다 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아들은 공부를 하러 간다며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간만에 혼자 있게 된 엄마가 안돼 보였는지, “이따가 점심 먹으러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아들은 사라졌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올 한 해 남은 나흘의 휴가를 어떻게 쓸지 고민하다가, 의식의 흐름에 이끌려 20년 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학 졸업 후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에서 배우로 8개월간 일한 적이 있었다.
첫 두 달의 급여 이후로 여섯 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해, 굶주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공연 연습은 해야 했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그나마 단원 중 재즈댄스 강사나 태권도 강사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연습실 밖에서 돈을 벌어 오면, 먹을 것을 사다가 연습실에서 기거하던 나와 다른 친구들을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했다.
무의식중에 전화를 걸었던 그 친구는 그중 한 명이었다.
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언제나 어제 본 친구 같은 느낌의 친구였다.
한 시간 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고 떠들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통화 중에 그 친구가 나에게 돈을 보내왔다.
아버지의 장례 소식을 듣고도 제때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서로 배고프고 힘든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일까. 내 인생 47년 중 딱 8개월을 동거동락한 그 시절 친구들은 언제 보아도 애틋한 마음이 든다.
20대 시절,
자신들의 꿈에 가장 열정이 가득했던 우리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직 세상의 것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여서 그랬는지.
그 시절의 나는 참 생각도, 꿈도 많았다.
이따금씩 그때의 사람들을 다시 마주하면, 어느새 지금의 나는 20대의 나로 돌아가곤 한다.
되돌아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가 분명했던 것 같아 배우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길을 걸으며 참 많이 헤맸던 것 같다. 배고픈 직업이어서였기도 하고, 하면 할수록 내가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대학교 입학 면접 때,
“왜 사회과학부를 전공으로 선택하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아주 명확하게 답했었다.
"저는 연극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깊이 있는 사회과학 공부를 통해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면접실의 분위기가 또렷이 기억날 만큼, 그때의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3 시절 내가 알았던 나의 꿈은 세상에 깎이고 다듬어져, 대학 6년을 거쳐 졸업할 즈음에는 그 길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다.
배우로, 공연 마케터로, 뮤지컬 제작감독을 거쳐 강사와 공연기획자, 지금의 생활문화업무에 이르기까지 우연과 운명의 교차로를 지나오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가고 싶었던 길이었을까, 아니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따라온 것일까?'
나의 신앙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나스스로에게 더욱 이런 생각을 주입하는지 모르겠다.
'니가 착각해왔던 꿈은 욕망일뿐이야...그냥 니가 주어진 그 자리에서 감당해야하는 사명이 더 중요해!'
그렇게 어느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보다, 나를 통해 그분이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시는지를 아는게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되었다.
그때문인지 고향에서의 내 삶이 때때로 재미없게 느껴지고 지쳐갈 때도 많다. 하지만...그래도 이렇게 사는게 옳다라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나자신을 내모는것 같기도 하다.
나의 자만과 호기로 살아오며, 스스로를 망쳐왔던 시간은 40년으로 충분하다며...
앞으로는 내 인생이 설계된 대로...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게 옳다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설득한다.
평범한 주말을 억지로 휴가라 이름 붙이고, 사회생활을 억지로 끊어내며...
이틀 내내 아이들의 셔틀버스 기사가 되어 기다림과 운전을 반복하며...
오늘도 잘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