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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살아남기 위한 선택

이혼 후 10년 #37

by 누구니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곳과 제법 거리는 멀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하는 첫 며칠간은 매번 설레었다.

이 기분은 마치 새로 산 옷이나 신발을 만날 때와는 달리, 새로 함께 일하게 될 사람과 환경에 대한 기대만큼 함께 걱정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래도 회사로 가는 길은 자연과 더욱 친숙해지는 풍광이 펼쳐져 있어 포근한 마음이 들었다.

온통 화이트로 마감된 새 사무실벽과 책상, 그 속에 내 자리는 넓은 창가 옆에 배정되었다.

큰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체육공원의 인조 잔디와 그 위를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또 다른 에너지를 선사해 주었다.


나와 함께 채용된 직원들은 딱 4명이었다. 대표이사, 사무국장, 팀장 2명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기관 설립에 관여한 파견 공무원 2명이 더 있었다.

우리들의 첫 업무는 새로 만들어진 회사의 출발을 지역민들에게 알리는 출범식이었다.

아직은 채용된 팀원들이 없는 관계로 모든 준비를 관리자들이 직접 진행해야 했다.


어색한 서울말을 쓰는 바로 옆 팀장은 한 종교방송에서 PD를 하다가 왔다고 했다. 그리고 중후한 목소리의 나이 지긋한 다른 팀장은 누가 봐도 실무형보다는 감독관형 관리자로 보였다. 그나마 행정과 실무에 익숙한 사람은 나 밖에 없는 듯했다.


무엇보다 수습기간이 무려 2년이나었기에 무조건 열심히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어떤 업무가 주어지더라도 싫다는 말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혹여라도 능력 밖의 일이 주어진다면,

남들 모르게 배우면서 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주어진 업무는 완수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정규직 전환의 근거가 되는 근무 평정이 걸려있어 주어진 모든 일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평정에 대한 스트레스는 팀원들이 채용되고 본격적인 사업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더욱 커져갔다.

연간 문화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획자적인 마인드와 실행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 팀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직원들은 특별히 문화적 관심이나 열정이 있기보다는 그저 안정적인 공공기관을 기대하고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배정된 팀원들의 상태가 어떻든 상관없이 첫 해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내야만 했다.

모든 직원들에게 A부터 Z까지 차분히 가르쳐 주면서 사업을 실행할 시간이 너무 없었다.

상사들은 항상 정답이 정해져 있고... 매사에 칼 같은 정확함과 신속성을 원했다.

그들에게도 나의 사업 결과는 그들의 성과였기에 더욱 날카롭게 과정을 점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새로 만난 동료들과 관계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사적이든 공적이든 친근하게 다가오는 대화에 응하는 것도 새로운 사업을 잘 해내는 것만큼 중요했다.

" 바깥 분은 뭐 하는 분이세요?"

" 팀장님이 이렇게 밤낮으로 일하면 애들은 누가 봐요?"

이따금씩 생각 없이 던져지는 사적인 질문들...

업무 시간에는 바쁜 업무를 핑계로 자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술로 인해 더욱 친밀함을 요구하는 회식자리에서는 더 난감했다.


나는 술기운에 혹여라도 냉소적인 진실을 말하게 될까 봐 술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먼 집과 신앙적인 신념을 이유로 아예 음주를 하지 않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더 깊은 동료애와 팀워크가 만들어진다고 믿는 우리 사회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피하고 싶은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업무 외에는 직원들과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하지 않고 적정한 거리를 두며 지내게 되었다.


대신 공적으로는 더 좋은 업무 성과에 집착하게 되었다. 지역의 문화를 책임지는 기관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첫 해 사업을 독자적으로 기획하고, 팀원들의 뒷목을 억지로 끌고 실행한 끝에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름 순항 중인 우리 팀과는 달리, 낯선 지역 문화 사업에 고전하고 있는 옆 팀장과 마음씨 좋은 연세 지긋한 팀장의 업무들이 나에게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는 상사의 지시에 따른 내 행동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갖고 올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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