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후 10년 #39
나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있는 평범한 하루’를 만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의 거주지를 따라 이사한 집도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아파트로 골라 언제든 아이들이 편하게 놀러 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시내 중심가로 이사한 아이들은 제법 먼 곳에 있는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애들 아빠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차로 매일 바래다주었다.
나는 아이들과 하루의 시작을 함께 하고픈 마음에 매일 아침, 등교시간에 맞춰 학교 앞으로 찾아갔다.
그러다 큰 아들이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딸아이만 학교 앞에서 겨우 볼 수 있었다. 스쿨존 근처에서 내리는 딸아이를 보기 위해 나는 학교 정문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애들 아빠한테 내 모습을 들킬까 봐 마음을 졸여가며, 골목길 한구석이나 화단 뒤에서 딸이 등장하기를 기다릴 때도 많았다.
가끔은 학교 앞을 지키는 도우미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나를 향해 이상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아빠가 아니고 엄마라서 다행이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모르는 아이들에게 멋쩍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짧은 기다림 후에,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딸아이를 보게 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내 품 안으로 뛰어드는 딸아이를 안을 때면, 마치 십 년 만에 만난 가족처럼 애틋함이 느껴졌다.
비가 오거나 몹시 추운 날, 평소보다 늦어지는 딸을 하염없이 기다릴 때도 있었다.
그래도 무료한 기다림 끝에 딸아이의 고장 난 우산을 바꿔주거나,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따뜻한 핫팩을 건네주면, 엄마의 작은 손길이 아이에게 전해진 듯한 기분에 하루 종일 기뻐했다.
그리고 아이를 위한 축복 기도를 해주고 나면, 마치 다른 엄마들처럼 따뜻한 밥상을 차려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나님, 제발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매일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을 저에게도 허락해 주세요!”
성장과 함께 자꾸 움츠려드는 등과 어깨가 안쓰러웠던 아들을 볼 때면... 나도 남들처럼 매일 아이들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몇 년째 운동을 권유했던 내 말을 듣지 않던 아들이 친구가 다니는 태권도장에 한번 가보겠다고 했다. 평소 학원을 보낼 돈도, 보낼 마음도 없던 애들 아빠는 내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전제하에 딸과 아들을 모두 태권도장을 보내주기로 동의했다.
덕분에 이제는 매일 밤 9시 30분이 되면 태권도장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회사의 중요한 행사나 회식을 하다가도, 서울로 출장을 갔다가도 아이들의 하원시간을 지키기 위해 어김없이 나타났다.
태권도장에서 집까지는 차로 3분 거리. 20분 남짓하는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마실 물과 간식거리를 챙겨주며, 하루의 마무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짧은 영어 성경 구절을 함께 읽으며, 아이들이 내가 없어도 평안한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해 주었다.
노래방이 있는 상가 건물 제일 꼭대기까지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내려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여기서 사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매일 아이들과 함께 사는 엄마들보다 내가 더 살뜰하게 아이들을 챙긴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나의 이런 행동을 가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지나친 집착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부모가 이혼했다고 애들한테 엄마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소중히 키워온 커리어까지 바꿔가며 이 작은 고향 땅으로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다.
"항상 아이들 옆에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아이들이 내 품을 떠날 때까지는 이제 고작 7년 남짓. 그때까지는 후회 없이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