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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미안함이다

by 이운수

식탁 위에 놓인 A4용지 한 장.

그 위에 수수깡과 색연필로 꾸민 작품이 놓여 있었다.
우리 다섯 식구의 모습 같았다.

‘오빠’, ‘동생’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걸 보니, 둘째 가은이가 만든 작품인 듯했다.

나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아이의 작품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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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은이는 책상에 앉아 웃고 있었고, 오빠는 누운 모습이었다.
엄마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잘 모르겠고, 확실한 건 ‘아빠’가 ‘동생’을 안고 있는 모습이 단번에 눈에 띄었다.

'아빠가 동생을 안고 있다.'

순간,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은이 눈에는 아빠가 동생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걸까.

만약 가은이가 자신이 가장 사랑받는다고 느꼈다면,

그림 속 주인공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가은이는 삼 남매 중 둘째.
가장 와일드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딸이다.

내가 블로그에 올린 글도 유독 가은이 이야기가 많은 건, 에피소드도 많고 기억에 남는 순간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가은이는 나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미안한 손가락'이다.



2016년 1월 20일. 가은이가 태어난 날.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당시 아프리카 파병 중이었던 나는, 가은이가 태어나고 한 달이 지나서야 딸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늘 가은이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아빠 싫어.”라는 말을 자주 하는 아이도 가은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날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그런 걸까’ 하며 속으로 반성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책을 썼던 작가님 중 한 분이 초등학생 대상 미술치료 특강을 열었다.
가은이는 이 수업에 참여했고, 앞서 말한 그 ‘가족 인형’이 바로 그때 만든 작품이었다.

며칠 후, 아내가 선생님께 받은 문자를 내게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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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워'


그 한 단어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생각해 보면 막내 세하가 태어난 후, 나는 세하에게 가장 많이 웃어주고, 가장 많이 안아주었다.
잠들기 전, “아빠랑 잘래.” 하며 내 품으로 달려드는 것도 늘 막내 세하였다.

첫째 아이는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러서 애틋했고,
셋째는 막내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가은이.
늘 미안함의 대상이었다.



근무를 마치고 잔업까지 마친 후, 오후 2시쯤 퇴근했다.
샤워 후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는데, 빗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는 오후 5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6시면 가은이가 학원에서 나올 시간.

학원은 아파트 바로 앞이라 혼자 우산을 쓰고 올 수 있지만, 오늘은 왠지 데리러 가고 싶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학원 앞으로 향했다.
가은이는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아빠!” 하고 달려왔다.

평소에는 내가 말 걸어도 대꾸도 잘 안 하더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은이는 언제나 ‘아빠와 단둘이’ 있을 때만큼은 친절했다.


나는 조용히 가은이의 손을 잡았다.
가은이도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가은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가은이가 동생을 부러워하지 않게, 외롭지 않게.
지금보다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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