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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바나나 우유 맛있지?

by 이운수

일요일 아침, 아들 녀석이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왔다.
“아빠, 우리 오랜만에 워터파크에 가면 안 돼?”

나는 신문을 덮으며 대답했다.
“무슨 겨울에 워터파크야. 얼음 미끄럼틀 탈 일 있어?”
아들은 입을 삐죽이며 시무룩해졌다.

그때 주방에서 아내가 말했다.
“아들, 워터파크는 나중에 가고, 오늘은 아빠랑 목욕탕에 가는 건 어때?”

“목욕탕?”
아들의 눈이 반짝인다.
“그럼 엄마랑 동생들도 같이 가자!”


이사 온 뒤 처음, 코로나 이후로도 처음 가보는 동네 목욕탕.
다섯 식구가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함께 나섰다.

아내와 딸들은 여탕으로, 나는 아들 손을 잡고 남탕으로 들어섰다.
아들은 문을 열자마자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빠, 여기 엄청 크다! 탕도 진짜 많아.”
“그러게. 엄청 크네.”

나는 목욕탕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들은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물장구를 치고, 잠수도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탕 안에서 벌겋게 익어가던 어린 내가 떠올랐다.



어릴 적, 매주 일요일 새벽이면 아버지는 온 식구를 깨우셨다.
“일어나라, 목욕 가자.”
나는 이불속에서 투덜댔다.
“아, 디즈니 만화동산 봐야 되는데...”

운 좋으면 마지막에 나오는 다크윙덕이나 조금 볼 수 있을까.

하찮은 저항을 해보지만 결국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목욕탕으로 간다.

막상 목욕탕에 도착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뛰어다녔다.

온탕도 냉탕도, 내게는 그곳이 놀이터, 워터파크였다.

친구들과 냉탕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한바탕 놀고 있을 때,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은수야, 때 밀자!”

나는 시무룩하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작은 녹색 때타월에 손을 욱여넣고, 내 몸을 박박 문질렀다.
“아빠, 아파!”
“그래야 깨끗해지는 거야. 참아.”

나는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했다.
“나도 아빠 등 밀어줄래!”

아버지의 등은 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다.
두 손을 포개고 밀어도 미동이 없던 아버지.
'아빠도 아픈데 참는 거야, 어른이라서 그런 거겠지.'
그때 느꼈던 어른의 무게가 아직 선명하다.



“아빠, 이제 나랑 놀자!”

냉탕에서 신나게 놀던 아들이 내 곁으로 왔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아들, 아빠 등 좀 밀어줄래?”

아들은 활짝 웃으며 녹색 때타월을 손에 꼈다.
“이렇게 하면 돼?”
“응, 잘하는데? 근데 간지럽다! 하하!”

그러다 아들이 물었다.
“아빠도 할아버지랑 목욕탕에 왔었어?”
“응. 할아버지가 때 밀어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아프고 싫었어.”
아들은 생각에 잠기더니,
“그럼 나도 나중에 내 아들이랑 목욕탕에 오게 될까?”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고개를 돌려 거울을 보니
30년 전, 아버지와 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의 자리였고, 내 아들은 나의 자리였다.

‘이번 추석엔 아버지를 모시고,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야겠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아내와 딸들이 먼저 나와 있었다.
아내의 손에는 배불뚝이 바나나맛 우유가 들려 있다.

“배불뚝이 바나나우유 오랜만이네. 요즘은 얼마야?”
“2,000원, 비싸지?”
“글쎄, 어릴 땐 이거 사 먹는 사람들 부자처럼 보였는데...”


나는 아들에게 바나나우유를 건넸다.
아들은 무심히 빨대를 꽂아 한 모금 마신다.

"아들, 바나나 우유 맛있지?"
“그냥 우유 맛인데?”
“그래도 맛있지 않아? 아마 맛있을 텐데...”
“음... 뭐 그냥 그래.”

나는 어쩐지 허탈한 듯 웃음이 났다.
내 추억을 아들에게 강요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도 오늘 하루, 아들의 기억 속에도 따뜻한 무언가가 남았기를 바랐다.

“아들, 이제 매주 목욕탕 가는 거다!”
아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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