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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 the 하트히터 Feb 17. 2020

인식이 곧 위로다

feat. 운디드 힐러

슬픔에도 경중(輕重)이 있는가?


'안 아픈 사람이 어딨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예전에 너보다 더 했어!'

'아플 시간에 더 뛰어, 게을러
서 아픈 거야!'

'긴장을 안 해서 그래. 정신 차려!'


수도 없이 들었던 말들, 자신이 의사라도 되는 냥 맘대로 진단하고, 자신의 무용담에 비하면 나의 상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나약하다는 듯 평가하는 그런 잣대들이 역겨웠다. 타인의 슬픔을 자신의 무용담을 돋보이게 하는 '저울질'로 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위로를 구하거나 핑계를 댄 적도 없었다. 도움 또한 구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은 채 악착같이 회복하고 이겨냈다. 다행히도 실망하거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무너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나를 점점 채운 것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나의 인식과 자세에 대한 반추였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53p




슬픔도 공부가 필요하다



슬픔을 이해하는 데도 과연 공부가 필요할까?
사실 슬픔은 나이를 먹어가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 감정이다. 한 때는 나 역시도 나의 슬픔에 대해, 그리고 타인의 슬픔에 대해 그토록 매정했었다. 나의 슬픔에 대해서는 나약함이라는 딱지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난처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확하기는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은 아니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섬세하고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해야 한다. 그 어렵고 느린 길을 걸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은 그 대신 권력을 가지려 한다. 권력을 얻어 명령의 주체가 되면 커뮤니케이션을 생략해도 된다 고 믿기 때문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44p


그런 나에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슬픔에 대해 진중히 생각하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계기였다. 너무나 섬세한 책이다. 읽는 동안 수없이 책을 덮고 마음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읽어갈수록 마음속에 다짐들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었다. 슬픔에도 공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91p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위로해야 하는 순간에 멋들어진 몇 마디를 늘어놓거나 훈계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타인의 슬픔을 위로한다는 것은 그저 그러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그 사람의 슬픔을 알지 못한 채 건네는 말들은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아프게 한다. 여러 마디 말보다 오히려 따뜻한 눈길, 그리고 경청이 그 사람의 슬픔을 덜어주는 일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앎' 그 자체로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8p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란 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내 상처를 극복함으로써 다른 이들을 치유하는 사람을 뜻한다. 나는 여전히 누구를 위로해주거나 슬픔을 덜어주는 데는 한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의 부족한 상태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나의 상처를 극복한 경험이 타인의 슬픔을 낮추고 나의 무용담을 돋보이게 하는 저울질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는 치유제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운디드 힐러'가  다짐해본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76p





* 참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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