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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 the 하트히터 Feb 21. 2021

잊고 있던 것을 돌려드립니다

feat. 유토피아는 시간이 멈춘 곳이다

어릴 적 낙서왕이었던 소년


나는 어릴 적 낙서왕이었다. 손에 필기구만 잡았다 하면 어디에든 낙서를 했다. 눈에 보이는 종이는 물론이거니와 내 방의 벽, 심지어는 동네 벽이란 벽에도 크레파스와 분필로 낙서를 하곤 했다. 그런 나를 위해 어머니는 내 방 벽면을 온통 달력과 신문으로 도배를 해주셨고 나는 맘껏 낙서를 할 수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낙서를 넘어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지냈다. 선생님들의 얼굴을 그려드리고 문제집을 받았고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주고 빵과 음료수를 얻어먹었다. 게다가 내가 앉는 책상들은 하나같이 나의 도화지 역할을 해야 했고 모든 교과서와 공책에는 글씨보다 그림이 더 많았더랬다.
당연히 이런 나의 적성을 살려 미대에 진학을 했다. 나의 전공은 애니메이션이었다. 공부는 잘하는 편은 아니어서 목표했던 대학에는 떨어졌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학과에 합격을 해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당시 친구들은 점수에 맞춰 자신이 전혀 관심도 없는 학과에 가야 했던 친구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어릴 적 꿈을 실현시킬 무대에 첫 발을 내디뎠다.


사람들은 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게 판타지는 영웅이 되는 공간이다.

- 미야자키 하야오





미야자키 세계를 찾아서


- 출처 : 네이버
미야자키는 영화감독이자 애니메이션 거장이기 때문에 질책이 아닌 현실적이고 흥미로운 수단으로 젊은 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가 영화에서 훈계나 설교가 아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기적에 가깝다. 모험, 마법, 약간의 로맨스를 통해 온통 뒤죽박죽인 세상으로 관객을 끌어들여 그들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어둠을 초월할 가능성을 발견하게 했다.

- <미야자키 월드>, 350p


대학시절 나에게 있어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은 일종의 종교와도 같았다. 디즈니와 픽사 등의 미국 애니메이션과 재패니메이션에도 훌륭한 작품과 감독들이 많기는 했지만 파괴와 절망 속에서도 끝끝내는 회복과 희망을 안겨주는 미야자키만의 세계관이 좋았고, 애니메이터로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용돈을 모아 일본어 원서로 된 미야자키의 콘셉트 북이나 스토리 보드북을 하나씩 구할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당시에는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았기에 동대문 상가를 뒤져서 간신히 구하거나 학기마다 오시는 외판원 아저씨를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고 가격 또한 매우 비쌌다).


뛰어난 그림 실력과 끈질긴 인내는 미야자키의 중요한 무기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는 위대한 애니메이터가 될 수 없다. 그를 뛰어난 애니메이터이자 감독으로 만든 건 심리적 깊이다. 미야자키가 작품마다 반복하는 테마들의 심리적, 미학적 스펙트럼은 빛과 어둠을 모두 포용한다.

- <미야자키 월드>, 53p


최근에 <미야자키 월드>라는 책을 읽었다. 미야자키를 좋아했기에 내심 기대를 하고 펼친 책은 기대 이상의 감동을 주었고, 더불어 미야자키의 그간의 작품들을 모두 다시 시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에 미야자키나 지브리에 대해 나온 책들은 꽤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들이 미야자키의 천재성이나 작품들의 가진 위대함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미야자키 월드>는 애니메이터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미야자키가 거진 어둠과 빛을 속속들이 파고든다. 수사학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수전 네이피어'는 미야자키를 직접 여러 번 인터뷰한 경험과 수사학적인 해설을 통해 작품 속 요소와 그것이 의도하는 바를 매우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저자의 한 인간에 대한 방대한 자료 조사와 면밀한 작품 분석 덕분에 <미야자키 월드>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해 다룬 책들 중 미야자키와 그의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미야자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의 축은 용기, 수용, 기쁨의 신비한 조합이다.
그의 비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워지지만,
미야자키 세계에서는 여전히 희망이 절망을 이긴다.

- <미야자키 월드>, 11p





잊고 있던 것을 돌려드립니다


<토토로>는 많은 면에서 스베틀라나 보임이 말한 '세게 보편적이면서도 지역 특수적인 회복의 향수'를 구현한다. 보임이 정의한 향수는 "처음 봤을 때는 (...) 장소에 대한 동경이지만, 실제로는 (...) 지금과 다른 시대, 다시 말해 유년기에 대한 열망"이다.

- <미야자키 월드>, 195p


미야자키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솔직히 고르기가 매우 어렵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책을 읽으면서 유난히 마음속에서 되뇌게 되었던 작품은 <이웃집 토토로>였다. 대학 시절에 수도 없이 봐왔던 작품이었지만, 이번에 내가 토토로에서 본 것은 어쩌면 작품 자체가 아니라 '나의 지난 시간'이었던 듯하다. 작품의 내용과는 별개로 토토로의 마법은 보는 내내 나의 가슴을 울렸다. 저자의 말처럼 토토로가 대안적이고 매력적인 삶에 관해 제시하는 독특한 비전은 사실 상실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 지나갔기에 그리움과 애틋함이 더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야자키 세계에서 다른 존재에 대한 열린 마음과 이해는 우리가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것, 다시 말해 우리 문화와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회복시켜준다. 그런 부분들은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우리가 올바른 시각을 되찾는다면 기 큰 풀 사이로 빛나는 도토리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 <미야자키 월드>, 219p


토토로가 끝남과 동시에 토토로의 마법도 끝이 났다. 하지만 내가 잠시나마 다녀온 여행은 나에게 다시는 못 돌아갈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비록 지금은 전공을 관두고 그림도 안 그린 지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이웃집 토토로>의 "잊고 있던 것을 돌려드립니다."라는 캐치 프레이즈처럼, 과거에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던 시절의 꿈과 추억들, 그리고 잊고 있던 애니메이션의 힘에 대해 떠올릴 수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사는 오늘이 미래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유토피아가 되려면 바로 현재 이 순간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애니메이션 작품과 위대한 애니메이터들은 많다. 하지만 내 마음속 단 한 명은 오로지 미야자키뿐이다. 그런 미야자키를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던 그간 며칠이 너무나 감사했다. 미야자키와 그의 작품의 팬이라면, 그리고 앞으로 애니메이션을 공부고 싶거나 현재 종사하는 모든 분들께 <미야자키 월드>를 강력히 추천하며 이만 마친다.


당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건
당신 스스로 주워 담은 수많은 광경이 만든 세상이다.
그 속의 생각과 느낌은 표현되길 기다린다.

- 미야자키 하야오





* 참고 : <미야자키 월드>, 수전 네이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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