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두려워하는 딸에게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나에게 남긴 것

by 조승희

혜령아, 얼마 전 우리는 1990년에 만들어진 멜 깁슨 주연의 영화 ‘햄릿’을 보고 있었어. 영화는 ‘햄릿 왕’이 죽고 왕비 거투르트가 격하게 흐느끼는 장면에서 시작됐단다. 옆에 있던 네가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울어?” 하는 물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우는 거야.” 하고 무심히 답했어. 엄마는 책에서의 인상적인 첫 대사 “Who’s there?”가 어떻게 그려질까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뜬금없는 시작에 조금 실망한 상태였거든. 그때 한 술 더 떠 “엄마, 엄마랑 할머니도 죽어?” 하며 네가 울기 시작하더구나. 머뭇거리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 하고 진실을 말했다가 콧물까지 흘리며 흐느끼는 너를 한참을 달래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자초했단다.





“대체 생의 굴레를 벗어나 영원한 잠을 잘 때 어떤 꿈을 꾸게 될 것인지, 이를 생각하니 망설여질 수밖에. - 그러나 이러한 주저가 있기에 인생은 일평생 불행하게 마련이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비난과 조소를 누가 참을쏘냐?
...(중략)
결국 이러한 분별심 때문에 우리는 모두 겁쟁이가 되고, 생생한 혈색을 가진 우리의 결심 위엔 창백한 병색이 드리워져, 의기충천하던 큰 뜻도 마침내 발길이 어긋나 실행의 힘을 잃고 말거든.” -『햄릿 3막 1장』




일곱 살인 어린 너도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두려움을 가졌는데, ‘죽음’과 ‘삶’ 사이에서 망설이는 햄릿의 고뇌가 마치 나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단다. 젊은이는 시간이 영원한 것이라 느끼고, 노인은 남은 시간만 세느라 삶도 죽음도 당당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엄마 또한 그렇게 살아왔단다. 도무지 남 일 같던 ‘죽음’이 실체를 드러내고 내게 다가온 것은 할머니의 암 투병을 지켜보면서였단다. 갑작스러웠던 아빠와의 결혼과 뒤이은 너와의 만남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하게 자리 잡았어. 엄마의 두려움은 ‘나의 사(死)’ 뿐만 아니라 ‘애별리고(愛別離苦)’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단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떠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어.



이 실체 없는 불안에 자신만의 백신을 마련해두지 않는다면 작은 일에도 이리저리 휩쓸려 버리고 말 것이란 생각이 들더구나. ‘죽음’이란 녀석은 제대로 살기 위해선 한 번은 진지하게 대면해야 할 상대였어. 그러던 어느 날 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단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잠겨있는 한 여인이 있었단다. 이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아들을 살리는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울부짖다가 실성을 하고 말았지. 이를 불쌍히 여긴 마을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가 보라고 일러주었단다. 부처님은 아이를 살리는 방법을 알려주었어. “마을에 내려가 겨자씨를 얻어오너라. 다만 한 번도 상을 치르지 않은 집의 겨자씨여야 한다.”라고 하셨단다. 이 여인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기쁨에 부처님 말씀의 의미도 생각지 않은 채 잠도 자지 않고 마을을 돌아다녔단다. 며칠을 쉬지 않고 돌아다녔으나 가족이 한 명도 죽지 않은 집은 그 어디에도 없었단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 여인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단다.




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 여인이 되어 ‘너’를 잃는 슬픔에 빠졌고 실성하는 순간을 거쳤으며 겨자씨를 구하기 위해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렸고 그러고 나서야 나도 너를 내려놓을 수 있었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공평하게 죽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두려움에서 한 발 멀어질 수 있었단다. 그 후 놀라운 일이 엄마 마음속에 생기기 시작했단다. ‘죽음을 인정한 후 그로부터 등을 돌리면 삶으로 돌아설 수 있다, 잃을까 두려워하며 우울해지곤 했던 그 마음이 잃을 수 있기에 더 사랑할 수 있다.’로 바뀐 순간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단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장에 선 순간이 있었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5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에야 그동안의 삶이 헛되게 느껴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생각하게 되었다는구나.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지.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제 끝이구나 싶을 때 정말 기적처럼 황제의 사면을 받아 살아날 수 있었단다. 그 후로 그는 삶을 소중히 여기고 글쓰기에 몰두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걸작을 남기게 되었단다.



여전히 한 번씩 나의 죽음 후 남겨질 너를 그려보곤 한다. 전에는 ‘엄마 없는 불쌍한 너’가 그려졌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단다. 그것은 남은 가족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그렇게도 소중한 너를 존중하지 않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거든. 너의 삶을 사랑하고 너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믿으렴. 요즘 어깨가 아파 저녁 상 한 번 차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 구나 싶다. 이러다 따뜻한 밥을 손수 해 줄 수 있는 시기가 많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면 김치를 써는 이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는지 몰라. 사랑하는 사람과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갓 지은 밥 한 숟가락 함께 먹을 수 있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렴. 드디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면 법정 스님의 이 말씀을 떠올려주면 좋겠어.




"하루 한 가지라도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한다면, 그날 하루는 헛되이 살지 않고 잘 산 날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목숨의 신비가 그만큼 닳아진다는 것입니다. 그 소모되는 생명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네 인생의 가치를 드높이렴.
삶의 고통 속에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결심했던 베토벤 역시 햄릿과 같은 고민에 빠졌던 것일까? 그러나 죽음을 마주한 후 삶으로 돌아선 그는 남은 생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삼가며 작곡에 몰두했단다. 절망 속을 헤매다 드디어 삶의 찬가로 나아가는, 처절한 악장이 있었기에 마지막 3악장이 빛을 발하는 듯 그의 음악이 오늘따라 더 숭고하게 들려오는구나. 엄마도 너에게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쓴다. 언제 생이 끝난다 하더라도 지금 쓰는 이 글이 너와 나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갈게.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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