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조르바와 붓다가 되고 싶은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으며

by 조승희

아침에 갑자기 된장찌개를 끓이려는데 두부가 떨어져 사러 나온 길이다. 집에 재워둔 딸이 깨기 전에 얼른 사서 돌아가야 하는데 생각하니 집 앞 슈퍼가 천리길이다. 손에 두부 한 모를 들고 후다닥 뛰는데 뭔가 갑작스레 나를 향해 달려온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을 날았고 잠시 뒤 눈을 떴다. 시간이 조금 흐른 것일까.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주위는 고요하고 내 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다. 창백한 얼굴에 검은 삿갓을 쓰고 검은 도포를 둘렀다. 그러면서 자신을 따라오라 한다. 어떻게 된 거냐, 나를 어디로 데려가느냐 물으니 너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 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가에 내 몸뚱이가 쓰러져있고 나는 검은 남자와 함께 공중에 떠서 내 몸뚱이를 보고 아연실색한다. 이 장면 낯설지 않다. 그렇다. 드라마에서 종종 보아오던 죽음의 장면이고 설마, 싶지만 내가 비련의 주인공이다.


몸이 아프신 엄마가 너무 슬퍼하시진 않을까, 하필이면 늦게 자느라 남편 출근길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헤어졌는데 그게 남편이 기억할 나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집에 혼자 있는 혜령이가 깨어나면 엄마 찾아 울텐데... 현아, 현준이가 제 인생 책임질 성인만 되었더라도. 전세금 마련하느라 저번 휴가를 자진 반납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적금을 깨서 평생소원이던 세계일주를 당장 했어야 하는데. 어질러진 이부자리와 어제 먹고 씻어놓지도 않는 그릇들을 보며 시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작가가 되보겠다고 자는 시간 줄여가며 읽고 쓰고 공부했는데 이렇게 끝인 건가. 남몰래 나만의 장소에 꼬불쳐 둔 그 돈의 정체를 언니에게라도 귀띔했어야 했는데.


'지금 여기 걸림 없는 자유'

명심하고 살아가고픈 삶의 지침구다. 도장의 문구로 만들어 책에도 찍고 공책에도 찍는다. 찍을 수 있는 흰 종이가 있는 내 물건에는 모두 찍어두겠다는 심정으로 남발하기도 한다. 좌우명대로 살아가고 있나, 내 마음공부의 진척도를 확인하고 싶을 때 이런 갑작스러운 죽음의 장면을 상상해본다. 저승길 가기 전 밟히는 그것. 사랑하는 사람들, 못 이룬 꿈. 보상받지 못했다 생각하는 지난날의 노력들, 원망과 후회 등 걸림 있는 것들이 얼마나 줄었나 점검해보는 것이다.


"그래, 가자. 한 세상 잘 살았다."라고 뒤돌아보지 않고 따라나서는 선승들의 그 얽매임 없는 해탈의 경지는 아득하기만 하다. 저승길 갈 때, 한 번 뒤돌아볼 때마다 천국에서 한 발 자국씩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가 이대로는 못 간다고 저승사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것만 같다. 걸림 없는 해탈 자유와 윤회의 사슬을 끊는다는 것은 이번 생애에서도 나와 관계가 먼 일인가. 좌우명은 옆에 두고 지침으로 삼는 글귀가 아니라 폼 나는 사어로 전락해버린다.


과연 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기는 한 건가? 당연하게 대하던 말에 스스로 딴지가 걸리는 날이 있다. 관계의 원만함을 위해 빈 말을 해야 할 때, 먹고살기 위해 피곤함을 등에 업고 일터로 향할 때, 세상 살아가려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지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할 때, 양손에 쥔 떡 중 어느 것이 내게 유리한지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소란스러울 때, 걸림 없이 산다는 건, 자유롭게 산다는 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아내이며 엄마이며 딸이며 며느리며 친구이며 사회적 존재인 나의 자유 한계선은 어디까지일까. 그 이름들을 다 벗어버리지 않으면 온전히 '나'라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다 벗어버리고 얻은 자유가 진정 행복으로 연결될 것인가.

책임과 의무 VS 오롯한 자유. 그 사이의 간극이 야당과 여당의 소통불가 싸움마냥 대치하는 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조르바와 붓다다. 내게 그들은 '자유'의 대명사다. 첫인상이 강열했고 아이러니 같았다.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는 마치 농담 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언젠가 꼭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는 밀린 숙제 같은 책이었고 '금강경'은 몇 번을 읽어도 실생활에 적용이 되지 않는 가르침이었다. 몇 년째 닉네임으로 빌려 쓰고 있는 그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부채감이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다시 꺼내어 들었다. 다시 붙어보자, 그런 심정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이 조르바가 아니라 두목인 '나'라고 한참 동안이나 착각을 했었다. 제목만 봐도 조르바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그럴 리가 없다고 철떡 같이 믿었다. 객관적인 조르바는 자식을 팽개치고 여자 꽁무니만 쫓으며 정착하지 않고 계획 없이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아닌가. 주인공은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조르바'가 아니라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붓다의 경전을 읽으며 생각이란 걸 하는 지식인 두목인 '나'가 책의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은 감정 이입되는 인물에 정이 가기 마련이니까. 나랑 쏙 닮은 것 같은 그 지식인 두목은 백번 이해했음에도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것 같은 조르바라는 인물은 도통 외계인 같았다. 이해불가였다. 나는 상식적이고 충분히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공자만 알고 장자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조르바가 내게 말한다. 긴 줄에 끝에 묶여 있어 자신이 묶여 있는 줄도 모르는 바보라고. 그러자 더 바보인 나는 "언젠가는 자를 거요."라고 오기를 부린다. 지금 생각하니 조르바가 이 말에 뭐라 답했을지 이제는 내 입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자르면 되는 거지, 뭘 망설이냐고 어리석음에 안타까운 조소를 보낼지도 모르겠다.

이 이해불가의 인물을 그린 이 소설은 그렇게에 너무나 강렬하게 내게로 왔다. 그는 내가 한정된 자유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바보라는 사실을 여실이 알려주었다. 가진 걸 다 걸어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둔 사람, 그래서 줄을 끊기는커녕 더 꽁꽁 묶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쳐주었다. 조르바는 나를 흔들었고 나는 꿈에서 돌연 깨어났다.


키스할 때는 키스만 하고 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만 먹는,진정 걸림 없는 삶은 이런 것이다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조르바가 있었다. 그는 뜻대로 안 되는 것의 원인이 자신의 손가락이면 그것마저 잘라버리는 사람이었다.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려낸 이 인물이 내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인간향에 대한 물길을 완전히 비틀어 놓았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꿈에서 깼다고 내가 조르바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더 옥죄는 족쇄로 작용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자괴감과, '언젠가는'이라는 희망 사이를 시소 타듯 왔다 갔다 했다.


조르바의 모습을 통해 자유란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이란 사전적 의미에 지우개를 들게 된다. 나는 얽매이지 않기 위해 버려야 하는 그 무수한 것들을 괄호를 쳐서 적어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반감이 일었다. 제일 소중한 것을 내어놓아야만 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니 함부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하지 말자. 그 말은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소금인형처럼 모든 것을 버릴 때에만 찾아오는 단어다. 때때로 대붕을 조롱하는 매미나 새끼 비둘기처럼, 조르바를 한심하게 보던 옛날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깨달았다는 상(相) 없이 깨달아버린 자 조르바, 그는 붓다와 닮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리 조르바를 읽어도 아무리 금강경을 읽어도 절대 놔두고 갈 수 없는 게 여전히 있다. 눈에 밟히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버려지지 않기에 그것들로 행복을 느끼는 내가 있다. 내가 언젠가 두고 갈 것이지만 여전히 잘 가꾸어 가고 싶은 무엇이 있다. 이것을 욕심이나 집착이 아닌 사랑과 생이라 부르고 싶은 에고가 있다. 붓다의 책만 읽는 '나'는 붓다처럼 살아가는 '조르바'가 되기는 힘들지 모르겠다. 내가 필요할 때만 조르바와 부처가 되고 싶은 얄팍한 사람임을 인정해버리고 싶다.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피안과 차안에 양다리 걸치고 시시때때로 박쥐가 되는 인생. 에고, 어쩌나.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이 문구를 만난 나는 행운아인가 불행아인가. 오늘은 불완전한 자유 안에서 희로애락의 널뛰기 속에 그냥 나를 두자, 그러자. 평생 다시 붙어보자고 시비를 걸어올 놈을 오늘은 나와 함께 잠재우자, 밤이 깊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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