命을 사랑하기 위한 방편

'장자'가 나에게 남긴 것

by 조승희

호쾌한 자유인 장자는 첫눈에 반할 정도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내게 쉽지 않았던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에 대해 이야기한 책들과 강연들을 찾곤 했습니다. 언제 만나도 나를 긴장시키는 장자, 알 듯 모를 듯 한 그를 2020년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엔 다른 이들이 만난 장자 이야기에서 벗어나 나만의 장자를 온몸으로 만나고 싶어 ‘낭송 장자’를 꺼내 들었습니다. 분명 그렇게 좋아한 때 나를 설레게 한 그는, 이번에도 역시 처음 만나는 듯 낯선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여전히 아리송한 그이기에 긴장감을 가지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흔쾌히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고 물음표가 몇 개나 책장 위에 그려지기도 합니다. 소리 내어 읽다가 한참 멈춰 생각하다, 무릎을 치게 하는 구절에는 기쁜 마음으로 별을 한 가득 달아봅니다. 이 과정들을 새 책에 다 하고 나서 전에 읽었던 책을 뒤적여보던 중 ‘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객관적 상관물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두 책 속에 독서의 흔적인 물음표와 별표들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한석봉이 불 꺼진 방에서 시험을 치르고 불을 켰을 때의 심정이 이와 비슷했을까요? ‘장자’란 산에 좀체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다는 실망감도 잠시 이 별표들이야 말로 실은 장자를 만나기 전부터 스스로에게 던져 오던 일관된 ‘물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명리를 공부하던 중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 내 사주는 어때?”였습니다. 여덟 글자가 한눈에 들어오는 도사 수준은커녕 딱 선무당 수준이었던 제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는 동안, 아무 말 없는 선무당의 망설임에 답답해진 질문자는 “사주가 안 좋아?” 하고 걱정스레 물어옵니다. “사주가 좋지?”하고 물어 온 이가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살아온 삶이 녹녹지 않았고 미래에 대한 기우까지 겹쳐 소심해진 탓이었겠지요.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를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명리학적으로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주팔자라는 것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기운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 여덟 글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기운을 이루는 근본 요소는 오행(목화토금수)으로 그것을 음양으로 나누면 열 개가 됩니다. 아무리 골고루 잘 가지고 태어난다 할지라도 두 개가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많은 사주가 한 두 오행이 아예 없기도 하고, 한 두 오행이 없다는 것은 자연히 다른 한 오행이 많아지게 되어 편중 현상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열 개로 구분된 오행을 인간살이에 적용하여 해석하기 위해 만든 명리 용어 중 ‘관성(官星)’이란 글자가 있습니다. 한자 풀이로는 ‘벼슬’이란 뜻을 가진 이 글자는 육친으로 보면 남자에게는 자식, 여자에게는 남편, 사회적으로는 직장, 명예, 규범, 책임을, 심리적으로는 통제, 명령, 충성 등을 의미하며 나와 남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기운입니다. ‘관’의 기운을 많이 가지고 태어난 자는 명예를 이루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이로움을 남기도록 인간을 채찍질 하지만 위기감과 스트레스를 이겨내야 하는 힘겨움도 동반합니다. 베어져 죽더라도 ‘쓸모 있음’을 꿈꾸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입니다.



이렇듯 사회와 타인의 시선에 맞추도록 하려는 것이 ‘관’의 역할인데 ‘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없는 사주를 무관 사주라 합니다. 사회적 울타리가 흔들흔들하는 탓에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 어렵고 파재(破財)의 위험에 쉽게 노출됩니다. 그래서 체면과 타인의 시선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찬밥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통제하는 관이 없다면 관습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게 사고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거나 예술혼을 불태우는 사람들, 산을 벗하며 홀로 도를 닦는 스님들을 보면 무관 사주가 아닐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관다(官多)냐 무관(無官)이냐 그것이 문제로다.’하고 한탄할 법합니다. 이때 장자는 쓸모와 쓸모없음 사이에 있겠다고 하는데요, 중화(中和)된 사주와 비슷합니다. 중화된 사주란 오행을 두루 갖추고 기운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조화를 이룬 사주를 말합니다. 신생아 택일 시 명리학자들이 제일 중점을 두는 것이 이 중화의 원리에 맞도록 함입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맞추는 것조차도 쉽지 않을뿐더러 변수가 워낙 많아 정해진 시간에 태어나는 경우도 드문 것을 보면 인간이 운을 조절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그럼 이들은 자신의 사주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사진기가 없는 사람이 사진기가 필요해지면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나한테 저것만 있다면 멋진 사진을 남기리라 기대하며 책도 읽고 다른 사람의 사진도 구경하러 다닙니다. 옆에 사진기를 가진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말해서 잘 빌려와 볼까 궁리도 하겠지요. 그렇게 빌린 사진기라면 주어진 시간 동안 다시 찍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얼마나 공들여 사진을 찍겠습니까. 사진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집에 사진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중에 다시 찍을 수도 있단 생각에 사진은 대충 찍고 사진기 말고 좀 더 신나는 건 없나 기웃거립니다. 이러니 세상에 번뇌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자(多子는) 무자(無子)와 같다는 명리학계의 유명한 말처럼 관다(官多)인 자는 항상 책임감에 짓눌려 무한 자유를 꿈꾸며, 울타리가 없는 무관(無官)인 자는 안정된 직장과 돈을 갈망하게 됩니다. 중화(中和)를 이룬 자는 자신의 삶이 너무 평범하다고 한탄합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가진 것이 부족해 보일 때 사주를 탓하며 비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여덟 글자, 팔자입니다. 내가 가진 여덟 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해결을 위한 끝없는 노력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해소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 몸 희생하여 이들의 쓰임으로 길이 기억되길 원하는 소나무의 삶도,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하고 싶은 것 눈치 보지 않고 바람처럼 살아보는 무관의 삶도, 한 평생 지루하다 투덜거리며 평범하게 살아보는 것도 모두 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나의 운명을 ‘자장이냐 짬뽕이냐’ 우열을 따질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진정 자기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생각합니다. 한석봉의 노력은 부족함이 있었으나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다시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었듯 ‘장자’를 읽으며 물음표가 여전하다 할지라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보다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음을 느낍니다. 끝내 ‘장자’와 이별할 날을 기약하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한 방편으로 장자 읽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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