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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Aug 24. 2021

'개인적인 체험'에 대하여

 오에 겐자부로 '개인적인 체험'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톨스토이 소설의 첫 문장도 행복보다 불행이 소설의 소재로 더 어울린다 말하는 것 같다. 고만고만한 행복 이야기는 명쾌하고 희망차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쉽게 읽히지만 고만고만 빨리 잊혔다. 그러나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나름 나름의 불행한 이야기들은 쓸쓸함이나 울분, 막막한 심정을 동반하며 잠이 오지 않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삶의 어느 한 구석에 있는 쓸쓸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 소설, 삶의 불가해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소설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는 붙을 수 없으리라.


 때때로 자처하지 않는 호된 운명에, 인생의 갈림길에 맞닥드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닥쳐온 현실은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해하지 않고는, 스스로 매듭을 짓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때 쓰이는 소설들이 있다. 그런 가혹한 운명 앞에 선 사람은 삶을 집요하게 관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들은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쓰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삶이 그렇게 내몰았기에 써낸 글들은 고통과 상실, 결핍의 대가다. 책과 영화 등 간접 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을 얕잡아 보지는 않지만 '살아 봐야 알지'라는 말의 무게를 따라잡기는 힘들다.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소설 '개인적인 체험'을 아낀다. 그는 '일본 양심의 상징' 이니 '일본 좌파 문학의 거장'이니 하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작가다. 사회적 발언도 많이 하고 그런 작품들도 많이 썼다. 평생에 걸쳐 써 온 그의 다작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다. 1964년 발표된 소설 '개인적인 체험'은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을 생각하고 읽으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작품이지만 나는 특히 이 책을 아낀다. 물론 책 곳곳에 사회적 발언이 은근히 드러나는 부분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는 주메뉴가 아닌 양념이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을 읽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다른 책들도 흥미가 생겼다. 나를 '오에'의 세상으로 이끈 책이다.


 주인공인 27살 버드는 유망한 대학생이었으나 결혼 후 알코올 중독으로 포기한다. 지금은 장인이 소개한 학원의 영어강사로 일하며 곧 태어날 아기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그토록 꿈꾸던 아프리카행이 더 멀어질 소식이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병원에서 아이가 머리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심각한 뇌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살 확률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살아나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의 쇠약사를 기다리며 겪는 심적 갈등, 아이가 죽지 않고 잘 자라고 있을 때 절망감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혐오, 미래에 대한 불안, 사라져 갈 자유와 책임감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젊은이는 바로 '오에'자신이었다.


“아기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기만 없는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목을 조르거나, 아니면 그를 받아들여 기르는 것, 두 가지뿐이야.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지.”  
p271

"그건 나를 위해서지. 내가 도망만 치는 남자이기를 멈추기 위해서지."
p272

"자넨 이번 불행과 정면에서 맞서 잘 싸웠군 그래"하고 교수가 말했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헸었어요. 거의 도망쳐 버릴 뻔했었죠" 하고 버드는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원망스러움을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 되어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 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
p274


 아기가 자연스레 죽기만으로 기다리는 것에 지친 버드는 그것이 자기가 직접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은 자기기만적인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직접 죽이느냐, 받아들여 기르느냐 사이에서 그는 '전통적'인 삶을 택한다.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프리카행을 포기한다. 그 며칠간의 버드의 심리 상태를 따라가며 나는 '버드'가 되었다. 절망하고 회피했으며 자기 합리화로 똘똘 뭉쳐진 나를 보았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누구나 품을 수 있는 마음' 일까 싶어 위로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레 아이를 받아들이는 결말이 자연스럽지 못했다고 작품의 마무리를 비판하는 소리가 많았다. 물론 소설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점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진짜 소설 속 '버드'가 아니라 현실 속 '버드'가 된다면 '전통적'으로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 만큼이나  힘들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는게 아닐까. 평생의 희생을 감내하겠다는 결정은 결국 진정한 자기애의 발현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훗날 결말을 고치는 게 어떻냐는 조언들에 오에 겐자부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고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젊은 의사한테 '이 애는 이대로 두면 죽습니다. 살리기 위해선 수술해야 합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면 역시 장애가 남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술을 하라고 의사들이 권유해도 당신은 거절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소설에 그 아이를 죽여버리려고 생각하는 아버지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저 자신은 죽이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중략) 하지만 자연히 죽는다면 그쪽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일 (신생아) 특수아실에 아이를 보러 갔는데 그건 오늘 죽었을까 하는 식의 어떤 기대가 있어서 갔던 것 같습니다.

 신쵸 카세트 강연(1988), 『시대와 소설·신앙을 갖지 않는 자의 기도』

 

이 소설은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가 시련 속에서 어떤 마음을 품었고 그 마음을 소설로 형상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지 생각해보았다. 쓰지 않고서는 넘어설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작품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소설이기에 당연한 말이다. 그는 지금 90세가 넘도록 장애를 가진 아들 히카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다른 소설과 수필에서도 자주 썼다. 때때로 아들은 다른 소설에서 다른 결말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의 솔직한 발언과 삶의 궤적이 '개인적인 체험'을 더욱 진정성 있게 만든다. 위대한 소설은 삶(경험)에서 시작되고 관찰(읽고 쓰고 사유하며)로 풍성해지며 시간이 그 값어치를 증명해 주는 것 아닐까.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과 후세에 길이 남을 글,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하나만 골라봐'란 질문을 꽤 오랫동안 해왔다. 나는 참으로 평범해서 고만고만한 행복밖에 모르는 축이었고 나름 나름의 불행 서사가 없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결정적 사유인 것 마냥 방패막이로 삼았다.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것보다 일상의 불행을 감내하는 것이 더 괴로운 나는, 위대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없다. 오히려 두렵다. 그냥 잘 살아내기 위해 읽고 쓴다. 소설을 쓰려면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라'는 셜터의 말은 위로가 된다. 경험 없이 관찰만 하는 사람이 위대한 작품을 남기기에 내공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오래도록' 쓰는 사람으로 남을 수는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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