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승희 Oct 06. 2021

내가 품어야 할 부적

-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고

 '남일동'이 세상 어디엔들 없으랴. 부산에도 '남일동'이 제법 많다. 전국에서 모여든 피란민들이 산 바로 밑까지 움집이나 판잣집을 지어 살며 형성된 곳이다. 산복도로를 따라가며 쭉 이어진 산동네 마을은 초량동 이바구길, 영도의 흰여울마을, 감천의 문화마을처럼 유명한 관광지가 된 곳도 제법 있고 개발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된 곳도 많다. 달과 가까운 이 마을들은 하나같이 멋진 야경을 품고 있지만 눈이라도 한 번 내리면 꼼짝없이 교통편이 막혀 발이 묶이는 곳이다. 한 시간 넘게 두 발로 눈길을 걸어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눈이 자주 오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할까. 요즘에는 마을버스가 운행되어 쉽게 오갈 수 있었지만 십 년 전만 하더라고 산행하듯 출퇴근했을 주민들을 생각하면 고단했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감천문화마을과 뒷산을 공유하는 괴정동에서 태어나 결혼하기 전까지 서른다섯 해를 살았다. 초, 중, 고, 대학교까지 같은 구에서 다녔고 일터도 감천동에 있다. 진정 사하구 토박이다. 감천에서 공부방을 시작한다는 말을 했을 때 부산 토박이 지인들은 동네가 너무 낙후되어 수준이 떨어진다고 우려를 표했다. 고개 하나 차이인 옆 동네지만 괴정동과 감천동에 대한 토박이들의 인식차는 '남일동'과 '중앙동' 같았다. 바로 옆 대신동에 옆에선 '남일동'이 되고 마는 '괴정동'이었지만 말이다. 십 년 전만해도 러시아 선원들이 많이 드나드는 감천 부두가 근처와 문화마을에 대한 소문은 좋지 않았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여 부풀려진 범죄 이야기들에 겁을 먹기도 했다.


 결혼 후 터널 하나 건너 옆 동네로 이사를 갈 때 드보르작의 '신세계로부터'가 울려 퍼졌다. 낯설고 설렜다. 더 나은 곳으로 가서가 아니라 정주민의 삶에서 벗어나보는 일탈의 느낌이 좋았다. 자수성가 한 아버지 덕에 동네에 몇 없던 아파트에서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십 년을 살면 오래 살았다 생각하신 아버지는 당시 유행하던 대형 평수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새 집으로 이사를 왔다. 딱 십 년만 살자, 생각하셨다는데 삼십 일 년 째 같은 집에 살고 계신다. 이사 후 아버지 사업은 날로 내리막길을 걸었고 이제 집값은 평수를 반으로 줄여도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 힘든 헐값이 되었다.     


 삼십 년 전 산 밑을 깎아 지은 아파트로 이사 오고 제일 불만이었던 것은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버스 정류소 1분 거리. 평지에 있던 아파트에 살다가 버스 내려 15분이나 걸어야 하는 새 아파트는 극복하기 힘든 난관이었다. 게다가 아파트 입구에서 '폭풍의 언덕'이라 이름 붙인 101동 입구까지 이르는 길은 비만으로 고생하던 나에게 가혹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오르고 내려가길 반복하는 시지프스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박완서 작가의 '엄마의 말뚝'을 읽다가 여덟 살 주인공이 송도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네 번째 고개를 앞에 두고 '고개는 마치 직립해 있는 것처럼 몰인정해 보였다.'라고 한 대목에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면 완만한 언덕에 불과한데 학창시절엔 가방에 책과 함께 스트레스까지 잔뜩 담고 다니느라 무거웠으려나. 집에 들어오면 다시 나가기 싫고 밖에 있으면 집에 돌아갈 일이 짐같이 느껴졌다. 그나마  아파트 초입의 101동은 나았다. 꼭대기동인 103동은 또 하나의 고개를 넘어야했다. 무더운 여름날은 틀어놓은 수도꼭지처럼 땀이 흘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폭풍의 언덕’에서 뒤집어진 우산에 질질 끌려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 집이 103동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딸이 초등학교 진학을 앞둔 일곱 살이 되자 이사를 가야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시댁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장만한 집을 리모델링까지 공들여 한 지 3년 정도 지난 때였다. 정든 집을 팔고 이사를 결정하기가 망설여졌지만 대안이 없었다. 새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볼 때 일터와 가까운 곳이 일 순위였다. 집은 식구들 편히 머리 뉠 곳만 있으면 된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막상 집을 팔고 감천으로 이사를 가려니 그 말이 입바른 소리에 불과했음이 마음속에서 증되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까다로운 소비자로 둔갑했다. 평소 쇼핑 스타일과는 다르게 꼼꼼하고 세심한 잣대를 들이댔다. 남의 집 구조에 대해 날카롭게 비평했고 학교 위치와 교통편에 대해서도 몇 개 되지 않는 후보들을 열심히 저울질 했다. 대출을 더 받아 더 나은 곳으로 가볼까 하는 욕심도 생겼다. 집을 팔면 감천동에는 조금 더 넓은 집을 구할 수 있을 터였다. 이거 재고 저거 따지는 동안 나의 숨겨진 속물근성이 명명백백 드러났다.    


 '머리 뉠 곳만 있으면 어느 곳이든 괜찮다.' 라는 나로 되돌아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을 보고 온 어느 주말 오후 남편이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다른 사람에겐 둔감해도 남편에게만은 촉이 발달한 나는 요즘 급격히 수척해진 남편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피는 중이었다. 언제가 한 번은 닥쳐오지 않을까 예감했던 불안이 현실에서 펼쳐질 때가 있다. 그 날이 그랬다. 남편은 전적이 한 번 있었다. 처음 일을 저질렀을 때는 남편이 나 몰래 빚을 졌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기에 충격이 컸다. 이번엔 액수가 크다는 것만이 더 절망스러웠을 뿐 충격은 덜 했다. 집 살 형편이 되지 않음에도 허세를 부리게끔 놔 둔, 남편이 미웠다. 나의 속물근성을 훤히 드러내 보인 뒤라 더 분했다. 왜 빨리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답이 필요 없을 질문을 수차례 했다. 그렇게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보려했던 남편 덕에 어쩔 수 없는 유목민이 되어 집을 찾아 헤매게 되었다.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면 남편 몰래 모아 두었던 나의 비자금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목표는 지금 집의 짐을 들여놓을 수 있는 월세 집을 구하는 것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나는 마음이 약해지면 엄마 생각이 간절해지는 사람이다. 엄마 곁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일하는 동안 엄마가 딸을 계속 봐주고 계셨으니 망설일 것이 없었다. 교통편이 어중간한 삼십 년 된 아파트 꼭대기 동은 매매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침 집을 팔려고 전 세입자를 내 보낸 후 몇 달을 기다려도 집이 팔리지 않자 다시 월세로 세입자를 구하는 분이 있었다. 남편과 유일하게 하나 나 온 월세 집을 보러갔을 때, 나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온순한 소비자로 다시 돌아왔다. 짐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고 옛날 집이라 구조가 번듯했다. 그렇게 오르내리기 싫던 폭풍의 언덕은 운동 삼아 오르내리기에 적격으로 보였다. 싸게 내 놓은 집이라고 집주인은 새로운 도배, 장판을 해 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런 조건임에도 혹여나 그 귀한 집을 놓칠세라 살던 집이 팔리기도 전에 계약을 하고 이사를 왔다. 마음의 장난질에 휘청휘청 흔들리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폭풍의 언덕을 두 번 올라야 하는 103동에 전월세 집을 얻어 괴정동으로 귀향했다. 마음에 울리던 '신세계로부터'를 들으면 떠난 지 7년만이었다.  


 이상한 걸 묻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오래 살던 동네라 안면 있는 분들은 '엄마 옆에 와서 좋겠네. 여기 집은 얼마에 샀어?' 하고 물어오셨다. '아, 저희는 월세로 왔습니다. 마침 조건이 좋아서요.' 나 같으면 쉽게 물어보지도 못했을 것을 서슴없이 물어보는 사람들도 이상했지만 꼭 변병처럼 한 마디 더 붙이게 되는 자신이 더 이상했다. '아직 집이 안 팔려서요.' 라고 쓸데없는 정보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고 나면 나는 그만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직업이나 경제적 위치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는다는 내 머리 속 잣대가 사람을 가렸다. 생각이 가슴까지 지배하진 못했던 것이다. 아니면 내가 나에게 ‘나는 그런 속물적인 사람이 아니다.’하고 속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여전히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 신경 쓰는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니 씁쓸해졌다.      

 '불과 나의 자서전'을 읽으며 소설 속 홍이 엄마가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처럼 타인의 시선이, 불안한 미래가, 가난의 대물림이 무서웠던 게 아닐까. 아끼고 모아서, 아니면 한 방을 노려서, 남일동을 벗어나 중앙동으로 간다고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중앙동을 벗어나면 또 다른 중앙동이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서 신기루처럼 나에게 보내는 손짓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힘든 옛날식 가난이 나를 괴롭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경제적 풍요에 대한 갈망과  자아성취의 유혹 속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내심 캐슬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폭풍의 언덕을 올라야 하는 마음이 현대식 가난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몰리고 몰리다 달님과 매일 인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함이, 아직 저들 보다는 낫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나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어도 정작 내 삶은 계속될 터였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이끌어 갈 의무가 있지 않은가. 삶에 대한 나의 자신감과 긍정성이 금강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헛것으로 내던져버릴 수는 없었다. 쫓겨 온 곳에서 다시 일어서야 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운명의 장난에도 굳게 나를 지탱할 금강과 같은 희망의 문구가 필요했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길을 떠나는 자 흥하리라.' 머릿속에 저장된 이 글귀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유목민 명장 톤유쿠트의 비석에 새겨진 문장이다. 중심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자처하는 것, 콤플렉스 없는 진정한 노마드가 되어 보기, 뿌리 내리지 않고 유영하기.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나를 지키는 방편이 되어 줄 것 같았다. 누군가에겐 벗어나야만 하는 곳이 다른 누군가에겐 지켜야만 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지 않는다면 가난은 그 이름이 가난일 뿐 진정 실체가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이사를 오고 집 뒷산을 자주 올랐다. 결혼 전에 자주 다니던 뒷산 등산길은 감천문화마을과 이어진다. 십 년 전 즈음부터 도시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벽화 그리기의 수혜를 받은 문화마을이 유명세를 떨치자 불과 몇 년 사이 감천문화마을은 카더라 통신에 벌벌 떠는 무서운 곳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벗어던졌다. 그러나 그 후로도 관광객의 발길이 닫지 않던 곳은 여전히 흉가처럼 버려진 곳이 많았다. 그 곳을 지날 때면 발걸음이 빨라지곤 했다. 코로나 19로 오랜만에 찾은 그 곳에 지금은 집이 헐리고 깨끗한 도로가 닦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상투적 어구가 신선하게 와 닿았다. 꼭대기라 확 트인 그 곳에서 '어떻게 여기가 이렇게 변했지.' 하고 내가 내뱉은 감탄사를 나이 지긋하신 동네 어르신이 들으셨나보다. '참 많이 변했지, 저기가 내 집인데 40년 넘게 살고 있어.' 하며 자랑스러워하신다.


 앞 베다란다 문을 열면 엄마와 수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 달과 가깝기에 건물 사이로 멋진 야경이 펼쳐진다. 덕분에 새벽녘에 바라다보는 그 어스름한 풍경에 반해 한없이 서 있을 때가 종종 있다. 뒷 베란다에는 사생활이 제공되는 담쟁이 넝쿨이 우거져 있다. 숲에 온 듯 청명한 새소리가 지척에서 들린다. 문을 양쪽으로 열어두면 여름철 돈 주고 사는 에어컨 바람 못지않게 시원한 맞바람이 분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옆에 절이 있다는 것이다.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에 민원이 쇄도하여 이제 새벽 예불 종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서 '무주(無住-집착하거나 머무르지 않음)'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고 응원하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이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갈 때가 되면 기꺼이 떠나주어야지. 사는 동안 이 집의 안 좋은 점은 내가 마련한 부적 속에 감추어 둘 요량이다. 괴정동에 불어 닥친 재건축 바람이 노후된 이 아파트까지 찾아왔다. 재건축 동의 조사 벽보를 승강기 안에서 읽고 마음이 싱숭생숭 한, 오늘 같은 날에도 ‘지족제일부(知足第一富)’ 라는 부적을 다시 한 번 꺼내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인적인 체험'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