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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05. 2021

질문의 방향성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아이가 일곱 살쯤 '왜' 놀이에 빠진 적이 있다. 처음엔 세상에 궁금한 것이 하나 둘 생긴다는 것이 대견했다. 그러나 '엄마 밥은 왜 먹어? 잠은 왜 자는 거야? 왜?'라고 끝말잇기 물음이 이어지면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 역시 '왜'나 '어떻게'라고 물어주는 것이 좋아 책을 읽지만 때때로 말장난에 불과한 질문은 아닐까, 하고 회의하게 되는 때가 있다. 답이 없거나 답이 필요 없는 물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 그만 놀이에 쉽게 질리고 피곤해져 버렸다.


 나는 이유가 무엇이든 죽음은 패배, 삶은 승리로 이분화하던 도덕 교과서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자살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품도록 한 첫 책은 고등학생 때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쇄기를 박은 책이 대학생 때 읽은 '그래도 우리의 나날'. 풀릴 것 같은 나사를 조여주는 것이 '마음'과 같은 소설이었지 않을까. 죽을힘으로 살아라는 말과 오죽했으면 소중한 것을 저렇게 버릴 수밖에 없었을까 사이에 내 마음이 있었고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허무와 자살이 안개처럼 삶에 스며든 1950년대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후미오와 세쓰코는 어린 시절 함께 자라 열정은 없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연인 사이다. '어지간해서는 고집을 부리지 않으며 되도록 상대에게 다정하려 했고, 또 실제로 다정한' 그런 관계를 편안하게 유지해나간다. 헌책방에 진열된 H전집에 운명처럼 이끌린 후미오는 책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온다. 책에 찍힌 낯익은 인장을 보고 세쓰코가 전집 주인이 대학시절 지인인 사노였음을 알게 되고 호기심이 생겨 그를 찾기 시작한다.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두 개의 편지다. 극렬한 공산주의자 사노는 혁명 앞에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전향하여 대기업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 연유를 밝히는 사노의 유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때, 그토록 어두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면 사람이 살아서 얻는 행복은 대체 무엇인가?
죽음을 생각했을 때 그토록 괴롭고 쓸쓸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면 지위며 보수며 일 같은 건 대체 무엇인가?

그래도 우리의 나날 p79 p81

 

숙명적인 질문 앞에 정처 없이 흔들리는 삶 대신 죽음을 선택하고야 마는 젊은이의 초상이 담긴 편지다.

20년이 훌쩍 지나 이 책을 다시 읽기까지 사노가 주인공이라 착각해왔던 이유를 짐작할 것만 같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느라 고독에 빠지고 마는 자의식 강한 청춘 캐릭터. 냉소주의에 빠진 선배가 담배를 피우며 내뱉는 허무의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하면서도 매혹되던 시절을 나도 지나왔다.


그러나 '그깟'일로 죽음을 선택하고 마는 인물들에 이제는 예전처럼 공감이 되지 않는다. 피지 못한 삶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죽음의 이유를 '그깟'으로 취급하고 마는 내가 꼰대가 되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막힌 벽을 뚫고 나가기 위한 '왜'가 필요하다고, '죽음'에 대한 질문은 삶을 전제로 했을 때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다가가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어진다.


사노의 귀한 질문을 받아 들고 모범 답안을 내놓은 것은 세쓰코의 편지였다.

내가 당신을 의해 밥을 짓고, 당신이 내가 지은 밥을 먹는 것, 그건 좋아. 다만 왜 내가 당신을 위해 밥을 지어야 하는지, 왜 당신이 내가 만든 밥을 먹는지, 그 두 가지의 왜가 같은 건지 다른 건지, 뭐가 뭔지 몰라서 불안할 때가 있다는 거였어.

그래도 우리의 나날 p25


 세쓰코는 사노의 질문에 '왜'라는 생의 의미를 묻기 시작했고 '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답을 온몸으로 찾아낸다. 그리고 자신이 더 원하는 삶을 향해 새로운 출발선에 앞에 선다. 그녀를 향한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후미오. '세쓰코는 너무나 감성이 풍부하고 너무나 삶을 사랑한다.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나는, 아니 우리는 그런 세쓰코를 가진 것을 우리의 자랑으로 생각할 것이다.'라고 온전히 그녀를 이해한다.


 세쓰코의 '왜'와 사노의 '왜'는 같은 물음이었으나 '생(生)'을 향한 질문'과 '사(死)'로 향한 질문으로 갈렸다. 다시 생각하니 답이 필요 없거나 답이 없는 물음은 없다. 지치고 피곤해서 '왜'에 대한 답을 끈질기에 찾아갈 힘이 없었을 뿐이다. '왜'라고 묻는 것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은 숨겨진 본능이다. 사노의 질문이 '길 잃은 자에게 북극성이' 되기 위해서는 질문의 방향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말장난 같은 '왜' 놀이도 생을 향한 질문이라면 쉽게 질리지 않을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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