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나다

인연 / 마티스 / 춤

by 조승희


마티스 <춤 1>

파란 하늘, 푸른 들, 알몸으로 신나게 춤을 추는 사람들. 앙리 마티스의 춤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덩달아 한바탕 춤판을 벌이고 싶다. 혼자서 강강술래를 출 수 없으니 내 손을 잡고 같이 빙빙 돌아줄 친구가 필요하다. 분명 춤 같은 건 못 춘다고 다 뒤로 뺄 것 같지만 그냥 손잡고 돌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몇몇 흔쾌히 내 손을 잡아 줄 것도 같다. 눈을 살포시 감은 사람은 J를 닮았고 그녀와 한 몸처럼 손을 이어 잡고 머리를 질끈 묶은 사람은 E 같다. 그녀에게 손을 잡힌 키 작은 여인은 H다. 유려하게 등을 휘고 손을 뒤쪽으로 뻗은 여인과 몸을 길게 늘인 사람 사이에 늦게 합류해도 '언제든 환영'이라는 듯 새로운 사람을 위한 여유를 두었다. 한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너를 향한 질문은 내게 되돌아온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도 기꺼이 춤추자고 내미는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일까. 춤추는 기쁨에 온전히 눈을 감고 오래도록 손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까.


며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생님 저 S에요. 잘 지내셨어요?'

"어?...... 어."

아주 잠깐의 침묵 후에 대화가 이어졌다

"선생님 집에 놀러 가도 될까요?"

"그럼, 와도 되지. 지금?"

"하하, 아니에요. 그런데 다행이에요."

그제야 어색한 분위기가 조금 가시고 웃음이 오갔다.

'그래,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때 와.'라는 인사를 끝으로 짧은 통화가 끝났다. 1월에 재미로 본 유튜브 타로카드 점괘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소원해져 버린 사람이 관계 회복을 원하며 연락을 해 올 것입니다."

그때 내심 속으로 떠오르는 얼굴은 M이었지 S는 아니었다. 뜻밖의 전화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S는 고 2 때 처음 만나 수능을 치기 전까지 국어를 가르친 학생이다.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도 S는 한 번씩 연락을 해왔고 자연스레 만남이 이어졌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고 S는 연애 상담과 진로 상담을 번갈아 하는 동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도 했다. 여러 명의 남자 친구를 소개받았고 분기별로 밥을 먹었다. 일 년에 두어 번씩 집에 놀러도 왔는데 공통된 화젯거리도 많이 없고 말도 별로 없는 S는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아이와 놀아주며 시간을 보내다 가곤 했다. S는 '3시쯤 갈게요' 하고선 5시가 다 되어 온다거나 밖에서 만나도 매번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으면 '죄송해요, 조금 전에 출발했어요.'라 말했다. 마지막 통화는 1년 전쯤으로 그날도 12시쯤 놀러 온다 하여 분주히 점심 준비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문자를 보내도 보지 않기에 자나보다 싶었는데 두 시가 넘어도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죄송해요. 오늘 못 갈 것 같아요. 내일 가면 안 될까요?"

한참 뒤 전화하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모습에서 이 인연이 이렇게 끝나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겠다 싶으니 오히려 후련했기에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약속시간을 지켜달라고 말할까 했지만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거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기곤 했었는데 인연의 끈이 조금씩 삭아가고 있었던 거다.

"바쁘다, 코로나 좀 풀리면 보자"

단호하게 말하고 마음 속으로 끈을 잘랐다.


내가 기다리던 M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친구다. 같은 과 동기가 된 이후로 코로나가 터지기까지 잘 지내왔다. 사진첩을 넘길 때마다 등장하는 하회탈처럼 웃는 얼굴. 친구들과의 첫 여행도 그녀와 제일 먼저 했고 내 기억 속에 싸움 같은 싸움을 해 본 유일한 사람이다. 회전초밥집 빈 그릇 쌓듯 함께 먹은 밥그릇을 가지런히 쌓으면 고층 아파트 높이만큼 올라가려나. 슬리퍼를 신고 밤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동네 친구를 2년이 다 되도록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있다. 우리 사이에 이상 기류가 생겼다는 것을 느낀 건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시기다. 코로나를 핑계로 만남을 거절했고 동기들 단톡방에서도 점점 말이 없어졌다. 몇 차례 안부 전화와 문자에서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이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철없던 소녀들처럼 '왜 노트를 빌려주지 않니?, 툭툭 던지듯이 성의 없게 말 좀 하지 마. 화난 게 있으면 말을 해' 등의 말들을 입에 올리며 따지고 들어 토라지곤 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 '나한테 뭐 섭섭한 거 있어?' 하고 묻는 게 너무 유치해서 부끄러워지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문을 닫아걸만한 일이 있었음에 분명하다고 믿었고 곧 빗장을 풀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배려 같았고 내 사는 일에 쫓겨 시간이 쇼트트랙 경기처럼 지나갔다.


스무 살의 나라면 잠도 못 자고 뒤척였을 일이었다. 몸은 둔하고 성격만 급한 나는 매듭을 잘 풀지 못했다. 생각도 감정도 천천히 풀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답답해서 속을 끓이는 스타일이었다. 찜찜한 마음을 숨기고 아닌 척하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손해 보더라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끊어버려야 속이 시원했다. 그러면 오히려 그들과 산뜻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친구 따라 강남도 갈 아이였다고 엄마가 지금도 종종 말할 정도로 친구들을 좋아해서 밖으로 많이 돌았다. 그런 친구들이 내 마음과 다르게 이별을 통보할 때도 몇 번 있었는데 어리둥절하고 슬퍼서 눈물만 날 뿐 도무지 상대가 왜 저럴까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수학공식은 잘 외워도 실전 응용은 잘 안되고, 책 속 주인공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는 알아차려도 생활 속 심리 역학관계에는 열등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도다-전도서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마라-법구경

인간관계에 힘이 들 때 만난 성인들의 문구는 공식적인 면죄부 같았다. 따지고 재며 의심하기 좋아하면서 필요에 따라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문자 그대로를 진리라고 철썩 믿고 싶어지는 구절들을 내 식으로 해석했다. 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오만함을 자존감으로 오해했고 맞지 않는 사람과는 구태여 감정 소모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했다. 타인과 거리두기를 잘하는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나는 먼저 걸려 온 어린 지인의 전화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인연의 매듭을 곱게 풀어보려 애쓰지 않고 무 자르듯 댕강 잘라버리려 했던 것이 미안했다.


감정의 소모 없이 다름에 대한 마찰 없이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행복할 권리를 내세우며, 상처받지 않는 것을 능력처럼 추켜세우며 맞춰가길 포기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인연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 뒤에 숨어 남의 일 마냥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무심하게 대처했던 건 아닐까. 나와 잘 맞는 사람만 골라가며 만날 수도 없고 겨울이 가는 게 아쉽다고 붙잡아 둘 수도 없지만 무너지는 공든 탑을 보고 헛되다고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없는 도인처럼 살아도 괜찮을까.


만남이 발로 움직여야 하는 게 아니라 마음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해진 스마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좋아하는 취미를 함께 공유하며 웃고 운다. 헤어짐도 마찬가지다. '왜 내 메시지를 무시하세요?'하고 번역기를 돌려 어색한 메시지를 자꾸 보내는 외국인을 표시 나지 않게 차단해버리는 것도 손가락 하나가 다 해내는 세상이다. 나는 코로나 뒤에 숨어서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잡아함경에 '맹구우목(눈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나다)' 이야기가 있다. 바닷속 깊은 곳에 사는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는데, 그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고 한다. 눈먼 거북이가 널빤지가 불편하다고 내동댕이치는 어리석음을 얼마나 자주 범하고 살아왔는가. 옷깃을 스치는 인연도 500번의 생에서 반복되어야 눈 한 번 마주치는 사이로 발전을 한다는데 좋든 싫든 모든 인연은 기적일지도 모르겠다. 손을 잡기 위해 몸을 있는 힘껏 뒤로 뻗는 <춤> 속의 키 큰 여인의 역할을 기꺼이 해내야 하지 않을까.

인연도 계절처럼 당연한 듯 왔다가 때가 되면 무심히 가버리지만 만개한 꽃도 초록빛 나뭇잎도 시원한 파도소리도 소복하게 쌓인 눈도 소중하게 여겨야 소중한 것이 된다. 그 계절에 충실해져야 내 삶이 아름다워진다. 삶을 아름답게 해 준 계절을 보내는 것이 아쉬워 붙잡아 보려는 손짓을 보이는 것이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만남과 이별을 당연시하지 말아야겠다. 눈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난 듯 귀하게 여겨야겠다. 너와 기꺼이 맞추어 가보겠다고 손을 뻗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가 만나기 위해 수천 번의 이별이 있었다고 믿고 싶다. 이별에 덤덤한 사람이 아니라 앞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고 싶다. 뒤돌아 선 이의 손을 붙잡으려 손을 뻗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나 끝내 겨울이 끝났다고 봄꽃을 피우려 한다면 뒤돌아 가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려주고 싶다. 고 도는 계절처럼 다시 온다면 자연스레 머물다 가게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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