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염화시중 / 빌헬름 함메르쇠이 / 책을 읽는 여인이 있는 실내풍경

by 조승희

빌헬름 함메르쇠이 <책을 읽는 여인이 있는 풍경>

"무인도에 단 세 개의 물건만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한 번씩 받아본 적 있는 오래된 질문이지만 이 물음 앞에 서면 졸던 뇌가 재밌는 놀잇감을 만난 듯 깨어난다. 제 들어도 지겹지 않다. '책, 워크맨, 사진첩'에서 '책, cd플레이어, 사진첩', '책, mp3, 사진첩'으로 30년 넘게 답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이 질문이 좋은 이유는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보조개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쌀, 라이터, 물..."등을 말하며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지인을 보면 우리가 서로 다른 질문을 받은 건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도 재밌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루 종일 음악 들으며 질리도록 책을 보다가 지겨우면 수영하고 별이 뜨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곳. 상상 속 나의 무인도는 그런 곳이다. 정말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쌀, 라이터, 총 등을 가져가겠다고 돌변할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나는 '무인도' 하면 정글의 법칙이 아니라 솔로 지옥을 떠올리는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다. 이제는 이런 낭만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핸드폰 하나로 통일될 것 같기도 하지만 낯선 곳에서 의지처가 될 물건 세 가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을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의지할 것이 책밖에 없던 깜깜한 밤을 추억한다. 이른 저녁이면 식당 문도 닫히고 유일하게 다니는 버스도 끊겨버리는 섬마을에 혼자 이틀 밤을 머물렀다. 아주 아주 비싼 호텔과 다인 이용의 몽골식 텐트 게르, 작은 섬이라 숙박 선택권이 없었다. 유명 건축가의 작품인 호텔은 남의 떡이라 섬에서 관리하는 6인실 게르가 듬성듬성 있는 숙소를 골랐다. '너구리가 나올지도 모르니 신발을 꼭 게르 안으로 넣어달라, 숙박객이 너 혼자밖에 없다'라는 관리인 말에 설렜다. 게르 앞은 바다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설치된 값비싼 예술작품도 노을을 당해내진 못했다. 해는 얼른 바닷속으로 숨었고 사방은 급히 어두워졌다. 밤이 긴 것인지 내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긴긴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파도는 내가 잠이 들어야 잠을 잘 모양이었다. 음악도 들을 수 없는 밤, 배낭 속 책 한 권은 의지처가 될 만큼 재밌고 든든했다. 세 개의 중단편을 엮은 추리소설집이었다. 으슬으슬함을 즐기려고 침대 등만 켜고 이불을 끌어당긴 후 한 장 한 장 아껴 읽었다. 그 분위기를 깨는 복병이 있었으니 참을 수 없는 요의였다. 텐트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 것도 무서웠지만 결말을 앞에 둔 추리소설을 손에서 놓는다는 건 요의만큼이나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림 속 여인은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죽인 걸까요?'라는 마지막 문장만을 남겨두고도 도무지 범인을 알 수 없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로체스터가 제인에게 정열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일까. 홍수로 떠내려온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모험에 나선 허크의 이야기에 빠진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가면 몸도 저절로 따라가는 걸까. 등을 굽히고 책 쪽으로 고개를 깊이 숙인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하는 이와의 거리를 좁히고 싶어 하는 마음, 헤어짐이 아쉬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마음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거울에 비친 탁자에서조차 소품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소박한 실내풍경, 무늬 없는 검은색 옷을 입고 부드러운 머리를 뒤로 살포시 묶은 여인이 책에 빠져 있는 모습. 창가에 놓인 화분 하나와 깊숙이 들어온 햇빛이 풍요로운 그녀의 내면 보여주고 있다. 꾸미지 않아도 사랑에 빠진 이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란 말이 떠오른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갑자기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주시려는구나 싶었지만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때 붓다의 눈에 한 명의 제자가 눈에 들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가섭이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이때 붓다의 마음이 어땠을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기쁨, 저절로 같은 미소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법정스님은 책이 '어떤 사람이 나와 친해질 수 있느냐 없느냐를 짐작하게 하는, 사람의 폭을 재는 한 개의 자(尺度)'라고 하셨다. 내게도 책은 영혼이 닮은 사람을 알아보는 척도다. 겉모습과 달리 영혼의 모습은 오래 사귀지 않으면 알아보기 쉽지 않다. 그럴 때 책은 나에게 성능 좋은 '자'가 되어 준다.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이렇게 조용히 속삭이고 싶어 진다. 연꽃 하나를 들어올린 붓다를 향해 미소로 화답했던 가섭처럼 나도 미소를 짓게 된다. '당신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어요' 하고 몸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다. 카페나 도서관에서 눈을 빛내며 책장을 넘기는 사람을 보면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하고 말을 걸어보고 싶다. 책에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유 없이 반갑다. 같은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호감도가 급상승한다. 책에 의지해 사는 사람에게는 한 끼의 식사보다 한 권의 책이 서로의 마음에 닿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읽은 책을 나도 읽고 그가 걸은 길을 따라가 보고 싶다. 그러나 걷기를 좋아한다고 모두 숲길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바닷가나 도심을 걷기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숲에서 만난 사람은 더 귀하게 여겨져 덜컥 손을 잡아버린다. 나와 함께 걷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다.


그림 속 여인은 나다. 염화시중의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읽고 있다.무인도에 가져갈 세 권을 책을 고르려고 즐거운 고민에 빠져다. <빨강머리 앤> , <톰 소여의 모험> , <알프스 소녀 하이디> 등 긴긴밤 혼자인 자신을 외롭지 않게 위로해주던 책들을 떠올리고 있다. 마지막장을 덮고 있는 힘껏 화장실로 달려가던 그 날의 다급함마저 선연하다. 그림 속 내 모습이 마음에 든다. 책과 함께일 때 나는 행복해진다는 걸 그림 속 여인을 보며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길을 걷는 친구들에게 이 오래된 질문을 넨다. 미소 짓고 있는 가섭을 만나 함께 책을 읽으며 살아가고 싶다.


"무인도에 단 책 세 권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책을 가져가시겠습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