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동반자, 언니에게

도반/ 윈슬러 호머 / looking over the cliff

by 조승희

윈슬러 호머 / looking over the cliff

내게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살 터울의 언니가 있다. 어릴 때 내가 말괄량이 '앤'이라면 언니는 차분한 '안나'였다. 주말이 되어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나가면 언니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자는 쪽을 택했다. 내가 새로 산 연필을 당장 깎을 때 언니는 서랍 속에 넣었고 내가 용돈으로 받은 동전으로 새우깡을 살 때, 언니는 돼지 저금통으로 동전을 퐁당 빠뜨렸다. 언니의 서랍 속 보물들은 '아끼다가 똥' 되거나 같이 사는 손버릇 나쁜 두 동생들에 의해 야금야금 줄어들었다. 언니는 울면서 엄마에게 일렀고 나는 울면서 혼이 났지만 이런 일들은 철들 때까지 반복되었다. 나는 아끼다가 똥 될 걸 알면서도 여전히 아끼는 언니가, 언니는 뭐든 당장 쓰거나 먹어버리고 자기 것을 탐내는 나를 서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바나나로 삼일을 견뎌도 일주일 동안 밥을 먹지 않아도 끄덕 없는 나와 달리 언니는 생애 첫 다이어트를 할 때 목욕탕을 다녀오다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무거운 건 내가 들어야 마음이 편했고 집안 행사나 가족 여행 계획 등도 내가 주도했다. 하얀 피부에 긴 머리, 순해 보이는 얼굴에 나긋나긋한 말투. 말수가 적고 얌전한 춘향이 역할은 언니가 맡았고 덜렁거리지만 힘이 센 나는 춘향이를 보호하며 따라다니는 향단이 역할을 맡았다. 초, 중, 고, 대학교까지 졸졸이 언니를 따라 같은 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20년이 넘게 함께 일하고 있다. 언니는 처음 사귄, 못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아이 둘을 낳았고 죽을 만큼 힘든 고비를 몇 번 넘겼다.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자라던 자매에게도 호된 바람이 불었다. 티브이 리모컨을 서로 차지하겠다거나 소시지 하나를 더 선점하려고 머리 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울던 것도 한 때, 어느새 우리도 중년이 되었다.


며칠 전 코로나에 걸려 집에 꼼짝없이 갇혔다. 둘이서 해도 정신이 없고 빠듯한 일을 언니가 며칠간 혼자서 해야 했다. 힘들다고 한 마디 할 법도 하건만 '다 잘 해결할 수 있으니 아무 걱정 마'라고 한다. 대문 앞에 여러 종류의 약과 반찬거리, 과일과 과자를 한가득 사놓고 말도 없이 간다.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피자가 배달되어 오기도 한다. 주말에 나와서 내 일을 도와주겠다고 쉬는 날에도 자신의 수업 보충 일정을 잡는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언니야, 나한테 고맙다고 느낀 적 있어? 있다면 언제야? 나 좀 덜 미안해지게 꼭 생각해서 말해줘.' 고맙다는 말은 쑥스러워 장난인 척 문자를 보내 보았다.

"아까 질문에 빨리 대답을 안 해줬네. 니가 고마웠던 때가 언제였나? 잠시 생각해봤는데... 그냥 항상 고마운 것 같아. 상투적인 말 같아 보여도 그게 딱 내 맘이다. 옛날 거기 살면서 기댈 사람 없을 때 내 옆에 니가 있었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니가 항상 나를 챙겨서 주말마다 놀러 다녔고, 내가 못 챙긴 내 새끼들 니가 다 챙겼고, 지금도 외로운 내 옆에 항상 니가 있고. 너는 나의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다. 사랑한다, 아프지 말고 같이 오래 살자~"


편지 한 장 쓰려면 하룻밤 내내 낑낑거리는, 언니에게 받은 다정한 문자. 문득 '디가 니까야(불경)'의 부처님 말씀이 떠올랐다.

취해 있을 때 보호해주고, 취한 자의 소지품을 보호해주고, 두려울 때 의지처가 되어주고,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두 배로 필요한 물품을 보태줍니다.
비밀을 털어놓고, 비밀을 지켜주고, 재난에 처했을 때 떠나지 않고, 목숨까지도 그를 위해서 버립니다.
사악함으로부터 멀리하게 하고, 선에 들어가게 하고,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게 하고, 천상의 길을 가르쳐줍니다.
친구의 불행을 기뻐하지 않고, 친구의 행운을 기뻐하며, 친구를 비난하는 자를 멀리하고, 친구를 칭송하는 자를 칭찬합니다.

불교성전 p577

불가에서 이렇듯 '도움을 주는 친구, 즐거우나 괴로우나 한결같은 친구, 바른 것을 조언해주는 친구, 연민하는 친구' 등 마음을 나누는 가까운 친구를 도반(道伴)이라 한다.


언니가 누워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시간만 나면 언니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애썼다. 계속 누워만 있을까 봐 걱정되어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혼자 놔둬야 했을 것만 같은데 그때 나는 무서웠다. 나의 성화에 언니는 차츰 더 자주 따라나섰고 서서히 기운을 차렸다. 힘든 일은 그 뒤에도 때때로 언니에게 불청객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쳤지만 의연하게 이겨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일이 생겨 말은 못 하고 끙끙대고 있으면 언니는 족집게 도사처럼 내 얼굴에 다 쓰여 있으니 털어놓으라고 자리를 깐다. 그러면 나는 말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뚝뚝 떨어진다. 둘이서 한참 부둥켜안고 운다. 못 이기는 척 비밀을 털어놓으면 속이 후련해진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제법 어른스런 사람으로 통하지만 친언니 앞에서는 응석 부리는 동생이 되고 만다. 그러다가 저녁에 무엇을 먹을까, 주말엔 무엇을 할까, 충격적인 뉴스 이야기, 재밌게 본 드라마 이야기로 수다를 떨 때는 둘도 없이 만만한 친구 사이가 된다.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솔직해질 수 있고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생각이 나며 힘든 일이 있으면 당사자보다 더 마음이 아프고 좋은 일이 있으면 내 일보다 더 기뻐지는 사이. 이런 사이를 도반이라 는걸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는 많이 변했다. 아픈 엄마와 위태로운 언니, 지키고 싶은 우리 아이들을 보며 걱정이 늘었다. 돈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쫌생이가 되었다. 몇몇 친구들 빼고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하고 방랑벽도 사라졌다. 언니도 많이 변했다. 많은 돈을 한꺼번에 잃은 뒤로는 인심이 더 후해졌다. 내가 옷 사는 걸 망설이면 대신 돈을 내주고 어디든 기회 있을 때 가자며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아이 둘을 혼자 키우면서 매달 빠듯하게 살지만 물건을 사달라고 들어오는 잡상인을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고 먼 나라에도 매달 돈을 보낸다. 자기 좋아하는 일에만 시간을 쓰는 나를 대신해서 내가 출근하기 전에 청소를 하고 유난히 부모님들한테 맥을 못 추는 나를 위해 상담전화도 학부모 응대도 다 도맡아 한다. 부모님 병원일이나 소소한 심부름, 집안 대소사도 언니의 지휘 아래서 착착 진행된다. 꽃처럼 여리던 언니는 웬만한 바람에는 꿈쩍하지도 않는 바위가 되었다.


미국의 자연주의 화가 윈슬릿 호머는 바닷가 여인들의 모습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 그의 그림 속 바다는 양산을 쓰고 해변가에 앉아 파도를 즐기는 여유로운 휴양지가 아니다. 고깃배를 띄우고 양동이를 들고 무언가를 캐야 하는 삶의 터전이다. 삼삼오오 어울려 일을 하는 모습, 일하고 돌아오다 노을 지는 바다 앞에 선 모습, 휴식을 취하는지 언덕에 앉아 넋 놓고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들 모습을 많이 그렸다.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맨발로 바다 앞에 선 그녀들은 때론 치쳐 보이고 때론 유쾌해 보인다. 집채만 한 파도를 보았는지, 무지개를 보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긴장된 표정을 짓지만 시선 너머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뒷모습만 그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파도 소리는 분명히 들리는 듯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데 말없이 상념에 젖은 여인들의 시선은 고요해서 음소거 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호머 그림 속 여인들은 주로 혼자가 아니라 둘, 셋이 함께다. 삶이 만만치 않아도 결코 외로워 보이지는 않다.


니는 여전히 긴 머리를 고수하고 나도 변함없이 단발머리다. 언니는 운동화를 사러 가서 꼭 구두를 사고 나는 구두를 사야지 하고 가서 꼭 운동화를 산다. 렇게 지금도 너무나 다르만 우리도 그림 속 여인들처럼 몸매도 성격도 다 둥글둥글 닮아가고 있다. 바다의 웅장함을 내려다보며 벼랑 위에 의연히 서 있는 두 여인. 풍채도 분위기도 자매처럼 닮았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조심스러워지는 법일까. 나의 삶과 일상은 언니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글쓰기를 시작하고서도 언니에 대해서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바람에도 풀리지 않을 듯 단단히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인들 그림을 다시 한번 보고 문자에 대한 답글을 이제야 쓴다. 내가 보내는 이 글이 든든한 나의 도반, 사랑하는 언니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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