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감기가 찾아왔다. 어제 오후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더니 밤에는 콧물이 흘렀다. 약을 챙겨 먹고 누웠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고립된 곳에서 혼자 씨앗을 뿌리고 물고기를 잡고 홍합을 캐며 살아가야 하는 소녀의 성장기를 읽었다. 열다섯 드디어 그녀의 인생에 사랑이 찾아왔다. '바로 그때 한 줄기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쳐 수천 장의 노란 시카모어 낙엽이 생명줄을 놓치고 온하늘에 흐드러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낙엽은 추락하지 않는다. 비상한다.' 소설의 문장은 서정적이었다. 사랑으로 인해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가을바람에 낙엽이 공중 부양하여 빙글 뱅글 도는 모습에 빗댄 표현이 아름다웠다. 조금만 더 읽어야지 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밤새 갈 곳을 몰라 휘몰려 다니는 가을 낙엽처럼 방황하는 꿈을 꾸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목은 잠겼고 몸은 무거웠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책상 앞에 앉아 훤해져 가는 창 밖을 보며 차를 마셨다. 따뜻한 액체가 목 안에 엉켜 있는 가는 실들을 녹이고 심장을 한 바퀴 돌아 어딘가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 선향 불꽃같은 짧은 탄성이 입에서 터졌나왔다. 검은 피 한 잔을 수혈받고 나니 잠겼있던 목도 몽롱한 정신도 점차 선명해지는 아침 기운처럼 제법 맑고 밝아졌다.
차 한 잔이 주는 소박한 행복감을 이렇게 잘 표현한 그림이 있을까. 오전의 집안일을 다 처리하고 한숨 돌리려고 찻물을 올렸을 것이다. 아침에 일하던 옷을 벗고 세탁해 둔 옷으로 바꿔 입은 듯도 보인다. 18세기 유행하던 앉기도 불편해 보이는 화려한 로코코풍 드레스는 아니지만 머릿수건과 어깨 숄을 빼놓지 않고 챙겼다. 문양 없는 소박한 티 포트에 찻잎을 담고 찻물을 데웠을 것이다. 코발트 안료를 이용한 이마리식 청화 자기 잔을 꺼내 차 받침대에 올리고 차가 우러나길 기다린다. 뜨거운 차를 막 따른 후 스푼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려주니 희미한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진다. 따뜻한 한 모금을 상상하며 향기부터 음미하고 있는 중일까.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멋진 풍경이 내다 뵈는 고급 카페가 아니라도 어떤가. 이 보다 더 마음 편해지는 시간을 누리는 자 어디 있으랴. 샤르댕의 그림 <차 마시는 여인>을 보면 나도 가만히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짓게 된다.
나의 어렸을 적 꿈은 사직운동장만큼 크고 넓었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사람, 가치 있는 업적을 남기는 사람이 될 거라 믿었다. 귀가 멀거나 귀를 자르는 사람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전 세계인을 향해 외치는 사람을,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의 흰색 사리를 입었던 사람을, 자신을 '어이'라고 지칭하길 바란 쿠바 혁명가를 동경했다. 드라마에서는 가난한 여주인공이 재벌가 실장님의 사랑을 받았다. 점심 한 그릇 먹으러 비행기를 탄다는 글과 함께 우동 사진 한 장이, 몇 백만 원 하는 가방이 10분도 안되어 완판 되었다는 기사가 그 시절에도 있었다. 황당한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은 젊음에서 나왔던 것 같다. 젊음은 희망이 바로 앞산의 무지개처럼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밝음이 있었고 나는 좀 순진한 편이었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장-시메옹 샤르댕은 우아하고 장식적인 로코코풍의 그림이 유행하던 시기에 소박한 부엌살림이나 여성들의 가정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도 처음에는 수입이 좋고 인지도 있는 역사화를 그리려 했으나 움직임을 그리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실력도 부족했던 듯 보인다. 강렬한 원색의 그림을 선호했던 나는 처음부터 샤르댕의 그림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대체로 어두운 톤이고 예쁘다고 할 만한 구석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 어질러진 우리 집 주방을 보러 루브르에 간다고? 아줌마가 차 마시는 모습에 무슨 미적 가치가 담겼지? 그런 의문을 품었다. 무지개가 그리 쉽게 잡히는 것이 아님은 인생의 스타트라인에 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알 수 있었다. 능력도 열정도 동네초등학교 운동장 크기밖에 되지 않는데 일제강점기도 민주화 항쟁기도 아닌 어중간한 시대에 태어나 버렸다. 인생 손익 계산은 컴퓨터보다 빨라서 값을 입력하기도 전에 위험을 감지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눈빛을 맞받아내는 줄리엣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갈망했지만 'Kissing you'를 들으며 고백하지 못한 짝사랑의 흔적만 일기장에 쌓아갔다. 샤르댕은 역사화 같은 대작을 그리기는 힘들겠다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정물과 주변인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이틴 소설이나 위인전이, 미니시리즈나 로맨틱 영화가 내 머릿속에 낭만적 환상을 키웠다. 떠들썩한 화려함 속에, 거대한 이상과 숭고함 속에 성공과 행복이 있다는 고루한 이미지를 새겨 놓았다. 욕망은 무지개 같고 신기루 같다. 분명히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 있는 것 같았는데 다가가면 또 그만큼 멀어진다. 지금 내 주위에 화려한 것은 없고 무지개는 항상 저 멀리에 있다. 로코코풍 드레스는 텔레비전 속이나 sns세상 속에만 있다. 적어도 내 세상 속에서 그것들은 이미지에 갇혀 있을 뿐 실체가 아니었다.
언젠가 여행하다 유명한 영국 브랜드의 차를 판매하는 카페에 들른 적이 있다. 고개를 90도로 쳐들어야 할 것 같은 높은 천장 끝까지 금빛 차 단지 통을 올려 사방이 번쩍 번쩍이는 매장이었다.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판매하는 티포트와 찻잔 가격이 낯선 외국 화폐 단위 탓에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0 두 개가 덧붙은 건 아닐까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해보았다. 촌스러워 보일까 봐 놀란 티는 내지 않았는데 주문한 차가 0 두 개 덧붙었던 티포트와 찻잔에 담겨 나오자 혹여나 깰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차 종류는 또 어찌나 많던지. 일행이 없었다면 메뉴 선택도 중학교 배정 뺑뺑이 돌리듯 운에 맡기고 말았을 것이다. 향기롭고 맛도 좋았지만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을 더 하고 돈을 더 받아 로고 박힌 가방 하나 장만하는 것보다 일을 덜고 그 시간에 책을 읽을 때 마음이 편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 예절에 어긋나는 건 아닐까 신경이 곤두서는 것보다 칼국수 한 그릇을 먹을 때 마음이 편했다. 아파트값이 어떻고, 어떤 연예인이, 어떤 재벌가 여인이 무슨 화장품을 바르고 어디 옷을 입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는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나의 현실은 샤르댕의 '차 마시는 여인' 같은 소박함 속에 있었다. 호탕한 웃음보다 은근한 미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천천히 알아갔다. 다시 읽는 내 청춘의 문장들은 강렬한 태양에 촌스럽게 바래버린 흑백 사진 같다. 그때는 분명 찬란하기 그지없던 것들이 세월의 필터를 씌우니 채도가 확 떨어져 버렸다
법정스님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책에 '소욕지족'이란 말이 나온다.
소욕지족 少慾知足 적은 것과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 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법정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p85
어젯밤 읽은 책의 그 소녀는 글을 몰랐지만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낱낱이 외우고 있었고, 별을 보고 집을 찾아갈 수 있고, 독수리의 깃털을 한 올도 빠짐없이 알았다. '소욕지족'의 정신은 한계를 깨닫고 현실을 직시한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한 차선책일지도 모르겠다. 소유가 적을수록 '소욕지족' 하겠다는 자유의지는 더 쉽게 실현된다. 샤르댕이 18세기 가장 독특한 그림을 그린 화가로 인정받는 이유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소박함이 갖는 가치를 누구보다 일찍 알아보고 추구해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 속 여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대한 화가로 거듭나게 했다. 이미지를 살짝 바꾸기만 해도 실망 대신 근사함을 언제 어디서든 맛볼 수 있는 게 삶이다. 생은 소박한 낮이 화려한 밤보다 절대적으로 길기에 차선책이 최선책이 되도록 하는 건 나의 몫.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차 한 잔에 담아 나에게 짠,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