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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Feb 28. 2021

타인의 인생도 되돌려보기를 할 수 있다면

빌 비올라의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를 보면서

인생도 영화처럼 되돌려보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빌 비올라의 영상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를 보며 든 생각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미술관 나들이를 했다. 친구와의 데이트 계획이 불발되자 떠오른 곳은  미술관이다.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되면 가보고 싶어 지는 곳이다. 대체로 미술관은 작품과 내가 일대일로 만나야 하는 소개팅 장소였지 왁자지껄 미팅 장소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새로운 만남은 차라리 일대일이 덜 어색한 법이니까.     


사전예약을 해야 했고 관람 시간도 두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어제 저녁 무슨 전시를 하나 둘러볼 겸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헛걸음을 할 뻔했다. 집에서 미술관이 있는 해운대까지는 15분 만에 한 대씩 오는 좌석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나 가야 하는 곳인데 눈 앞에서 버스 한 대를 놓치고 말았다. 해님과 내기라도 하는지 휭휭 소리 내며 외투를 벗길 기세로 불어대는 바람을 뚫고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법 시간이 지나있었다.      


지각도 한 데다가 먼 길을 달려왔으니 괜찮은 작품이  있으려나하는 기대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미술관에서는 4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부지런히 최대한 많은 후보들을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3층의 빌 비올라 전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2층의 중국 작가전 작품들이 예상보다 흥미로웠다. 내 급한 마음도 모르고 시간은 보폭을 넓혀가며 성큼성큼 지나가버렸다.      


얼마 전 모임에서 지인이 자신의 친구와 친한 어느 한 여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흔히 말하는 꽃뱀으로 50살이 넘도록 살아온 여인의 이야기였다. 마치 남동생이 당하기라도 했다는 듯 우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이야기를 전해주던 지인은 그녀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분개했으나 그 사람 마음이야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이라 쳐도 객관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행태는 객관적으로 비난받을 만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주관적인 그녀의 변명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다섯 개의 영상이 동시에 비치고 있는 작품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앞에 섰을 때였다. 어두컴컴한 전시실에 들어서면 천정까지 불길이 솟는 듯한 영상의 뒤편 아래 쪽에 작은 구멍이 있다. 몸을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그 구멍을 지나면 다섯 개의 영상이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 넓은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메인 계단의 반대편으로 올라온 탓에 순서상 제일 끝에 있는 전시실로 먼저 들어가게 된 덕분인가 나는 그 넓은 전시실에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들어선 순간이 영상의 엔딩 5분 전 즈음이었나 보다. 아무리 지루한 예술 영화라도 이야기의 엔딩 부분은 강렬함이 폭발하듯이 순식간에 전율하게 되는 장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졌다. 그 충격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새로 시작하는 영상을 처음부터 보기 시작했다. 숲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이삿짐을 하염없이 내리거나 배에 싣는 영상,  바다에 빠진 사람을 찾으려다 지쳐가는 사람들의 영상, 불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의 실루엣 영상 등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러닝 타임을 보고 들어왔다던가, 끝나기 5분 전의 강렬함을 먼저 맛보지 않았더라면 34분 동안 이삿짐을 배에 나르는 영상을 끝까지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지루하기 짝이 없을 수도 있는 그 시간들을 견디며 끝까지 보아야 연민도 이해도 공감도 생기는 것이었던가. 작품을  다시 보는 동안 몇몇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힐끗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작품의 진면목과 생의 숨은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지루함을 견디고 터져 나오는 봇물의 정체는 슬프고 통괘했다. 한 명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다른 소개팅 후보들을 포기해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아쉽지 않았다. 되돌려보기도 할 수 없는 타인의 인생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말 것, 이라는 반성문 하나를 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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