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밀밭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는 여우다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내게 남긴 것
어린 왕자에게
어린 왕자야, 너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 기억에 없지만 네 이야기를 담은 책을 처음 샀던 해로부터도 벌써 20여 년이란 시간이 흘렀구나.
그 사이 너와 관련된 추억도 제법 생겼단다.
남편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에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란 구절을 설레는 맘으로 한 자 한 자 손으로 적어가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김춘수의 시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너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는 구절을 설명해야 할 때면 너와 장미의 이야기를 졸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혼자 신난 아이처럼 떠들기도 했었다.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해.” 란 구절을 봉투 한 구석에 무심한 듯 남겨두기도 하면서.
그러나 정작 울음을 그치고 비명을 지르지 않고 나무처럼 넘어지던 너의 마지막 모습에 지금도 슬픔에 잠기는 나를 보면,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너의 간절한 그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단 생각이 든다. 한 번씩 멋진 문장이 필요할 때 너를 떠올리곤 했을 뿐이었다. 여전히 너는 나에게 피었다 지면 그 밤 아쉬울 뿐인 수많은 장미 중 하나에 불과했다.
너와 다시 조우한 것은, 지난가을 통도사를 산책할 때였어. 국화꽃 축제가 한창인 절 마당에 네가 있더구나. 절과 어린 왕자, 처음엔 어릴 적 알고만 지내던 고향 친구를 외국의 유명한 관광지에서 만났을 때처럼 그 우연에 반가우면서도 무언가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나도 너를 배경으로 형식적인 사진만 한 장 남기고 돌아섰단다. 얼마 후 읽을 책을 선택해야 할 때 네가 떠오른 건 모든 우연은 다 인연이란 말이 여실히 증명된 것만 같았어. 그렇게 20여 년 만에 나는 너와 해후했다.
다시 만난 너의 이야기는 새로운 감동이 아닌 처음 만난 감동이었단다.
집에서는 ‘어’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싶은 무뚝뚝한 남동생이 회사에선 유머러스한 과장님으로 통한다는 것만큼이나 낯설었단다.
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새롭게 보이는 그 느낌에 심장이 쿵쾅쿵쾅 소란스러워졌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건 내 세상이 온통 다 움직이는 것이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법정 스님은 너를 만난 기쁨을 영혼의 모음이란 글에서 ‘너는 사람의 폭을 재는 한 개의 자다, 너를 통해 비로소 인간관계의 바탕을 인식할 수 있었고 세계와 나의 촌수를 헤아리게 되었다.’고 멋진 사랑 고백을 하셨지.그 글을 읽고 나니 오히려 너에게 하는 나의 고백은 은유가 부족한 시 같구나.
상상하길 즐기는 너에겐 좀 상투적이지 않을까 소심해진다.
관용적으로 말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통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시를 즐기는 것보다 쉽고 편했던 탓일까? 내 곳간의 재미와 감동이 줄어드는지도 모르고 하물며 그게 얼마나 아까운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더라.
‘견상(見相) 하지 말고 견성(見性)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레와 같이 나를 감전시켰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을 쫓아왔으니 양 상자 속 양도 보아뱀 속 코끼리도 볼 수 없게 되어버렸어. 마음으로 본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단다. 본성, 본질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뒤따라 달려왔어.
글쓰기를 꿈꾸는 나는 창조적인 생각이 새로운 문장을 만들지 않을까 싶었단다. 그러나 금세 20세기 새로운 주제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회의가 밀려왔어.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상투적인 언어를 고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싶었단다. 하지만 한 마디 문장도 만들 수가 없었단다.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없었지. 언어가 생각을 지배한다는 말은 스르르 꼬리를 내렸단다. 내가 받은 감동과 실천 사이엔 실로 큰 간격이 있다는 걸 실감했단다.
‘웃으면 복이 와요.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등의 관용어를 쓴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단다. 싸우는 아이들을 훈계하는 나의 말,
“네가 먼저 잘 대해줬어 봐.”
사는 게 힘들어 남편에게 투정하는 나의 말,
“웃을 일이 없네.”
상투적인 문장을 쓰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 사이에도 어마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단다.
‘웃으면 복이 와요.’ 초등학교 1학년도 다 아는 말이지만 아무도 상투적으로 살지 않더구나.
"좋은 일이 있어야 웃지."로 변한 어른의 말이 되고 말았어.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고 가르치지만 "먼저 주는 건 손해야." 이것이 어른의 행동이 되고 말았어.
물 한 잔을 마실 때 ‘별빛을 받고 걸어온 발걸음과 도르래의 노래와 내 팔의 노력에서 태어난’ 바로 그 물을 마시는 것처럼 행해야 한다. 본질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었어. 상투, 통속, 은유 등 언어의 견상에서 벗어나 정성껏 살아내도록 애쓰기는 내 몫의 숙제다.
일체유심조(一 切有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만든다는 그 말이 너를 통해 다시 살아났구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너는 얼마나 가까웠던가. 다시 찾아본 너는 절의 한 자리에 참 어울리게 서 있구나. 날리는 스카프에 웃는 얼굴 너를 어디서 보든 이제는 낯설지 않을 것 같다.
너의 웃음소리는 아름다운 변주곡이 되어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 스며들 터이지.
마음으로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누군가 물어온다면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 말도 못 하겠지만, 행간 하나하나, 마침표 하나까지도 허투루 다루지 않아야 할 초심자의 마음으로 이제 시작이다. 새롭게 볼 문장들이 기다려지는구나.
나는 밀밭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는 여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