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마지막 주는 제법 오래 한파가 이어질 거라는 일기예보가 맞았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추웠다. 마스크와 추위로 눌러쓴 모자 탓에 서리로 가득한 안경을 닦으며 집 안에 들어섰다. 추위가 서서히 사라질 때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어? 웬일이지? 무슨 일이 있나?’ 의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내년에는 하는 일이 다 잘 될 거다. 너라면 잘 되지 않겠나.” 반가운 지인의 목소리다. 그 뜬금없는 대화에 약주를 좋아하는 지인이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싶었다. 전화기 너머로 자동차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서로 오랜만에 한 두 마디 덕담을 주고받다 보니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날이 벌써 12월 30일이었다.
새해가 되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며 떡국에 큰 의미를 담아 한 그릇 뿌듯하게 먹던 때가 있었다. 12월 31일이면 모여 앉아 연말 시상식을 보며 새해 소망을 페이지 한 가득 적곤 했었는데. 당연했던 것이 새삼스러워진 지금, 그 일을 다시 해보고 싶어 지는 것은 새해라는 것을 핑계 삼아 빌고 싶은 소원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쓰지 않고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려 했다. 일, 육아, 집안일에 글쓰기에 대한 미련까지 붙들고 살려니 당장 몸이 피곤했다. 몇 번 도전하지도 않은 독서감상문 공모에 떨어지고 나니 자신감이 떨어졌다. 블로그 글들은 조회수가 저조했고 좋아요와 구독이 힘이 된다는 영상콘텐츠도 좋아요와 구독이 없으니 할 의욕이 떨어졌다. 분명 좋아서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인정받기 위함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포기하기 위한 여러 변병들과 상황들이 마련되었다. 정말 마음 홀가분하게 살았다. 사실 꿈이란 것도 비빌 언덕을 보고 자리를 트는 법이다. 바쁜 일상에 즐길 거리가 많은 이 세상에 쓰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특히나 꿈을 생계로 하지 않고 자아실현의 도구로만 여기는 나에게는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시작은 우연한 사건들의 짜깁기에서 왔다. 며칠 뒤 마감되는 무료 부모 상담 프로그램에 자리가 남았다는 말에 신청을 하고 상담사를 만났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사님이 사진 카드 뭉치를 펼치더니 지금 상황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자유롭게 고르라 하셨다. 타로 심리를 공부한 적이 있던 나는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내가 대상자가 되어 카드를 고르니 제법 긴장이 되었다. 뽑아진 아홉 장의 카드를 세 종류로 분류하신 상담사는 차분하게 질문을 시작하셨다. “이 카드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아요? 이 카드 묶음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시겠어요” 등의 간단한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대답은 예상외로 쉽지가 않은 것이었다. “아쉬워하는 것 같아요.”하고 머뭇거리면 “왜 아쉬워한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하고 바로 다음 질문이 들어왔다. “포기한 걸 아쉬워하는 것 같아요.” 진짜 내 마음이 그게 맞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무척 낯설었다. “무엇을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상담사님의 질문은 준비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맞춰 응답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생겼다. 감정을 거르지 않고 바로바로 쏟아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기도 한 상담사의 전략에 딱 걸려들었다. 내 답을 정리하고 포장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내 깊은 욕망과 무의식이 훅 하고 올라올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한 시간 가량이 눈 깜작 할 사이 지나갔던 그 첫 상담 이후 잘 잠재워 둔 ' 꿈'이란 녀석이 슬금슬금 깨어나려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같이 책을 읽고 글도 쓰던 J는 ‘브런치 작가’를 신청해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 감탄할 만한 글들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한동안 감정이입하며 만났던 ‘엘레나 피렌체’ 나폴리 4부작의 주인공 레누는 1부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 보여준 열등감을 노년이 된 4부에서는 “이제 나는 짝꿍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정체성이 확고한 어엿한 어른이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나도 J와 레누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Dream은 명사형과 동사형이 같다.’는 문구를 보았다. 꿀 때라야 꿈이다. 글쓰기가 ‘너의 꿈이 맞니?’, ‘너의 꿈은 진행형이니?’라고 단호히 묻고 있었다. 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글쓰기’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장난감 빼앗긴 아이처럼 상실감이 밀려왔다. 핑계와 변명들로 내가 내게서 뺏어간 꿈이었다. 포기가 그랬듯 다시 시작할 이유도 구색을 갖추었다. 개별적 사건들을 이어 글쓰기라는 꿈의 별자리 다시 그려보려는 것은 우연이 모인 필연인 듯 느껴졌다.
새해를 맞아 고향에 다녀오는 늦은 밤, 한적한 시골길에 보름달만 훤하다. 소원을 빌어야겠다. 그래, 이제는 쓰고 싶은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바뀌어보자. 꿈을 진행형으로 붙들고 갈 수 있는 용기와 끈기를 갖추자고 발원한다. 막힘없이 차도 달리고 달도 달린다. 이대로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차는 때때로 신호에 멈추고 달은 건물에 가려졌다가 이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잠시 숨 고르기 했던 나의 꿈도 오늘부터 초록불 모드로 전환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길안내를 종료합니다.’는 반가운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때때로 켜질 빨간색 불도 쉬어가는 선물로 여기고 드라이브를 즐겨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