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L매니지먼트 대표 이구용 인터뷰
황선미, 신경숙, 공지영, 한강, 이정명, 김영하……. 우리 눈엔 여지없는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조금만 외국으로 나가면 낯선 그냥 ‘아시안’ 작가일 수 있다. 홈 어드밴티지 전무(全無), 학연, 지연, 제도 권력도 없는 더없이 냉정한 것이 세계 문학 판권 시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품이 매력적이면 게임 끝이라 간단히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출판물이나 문학은 인간의 감정, 사고, 지성 모든 영역에 관련되어 문화 장벽이 높다. 전문적이고 세심한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력적 작품이 전달될 기회도 현지독자들이 매력을 느낄 기회조차 없을 수 있다. 출판 에이전트 이구용이 없었다면 1%에만 외국문학에 자리를 내주는 미국 출판 시장에 앞에 언급한 작가들의 책이 진입하는 일이 없을 수 있었다. 이구용이 운영하는 KL매니지먼트 사무실이 있는 성북동의 인근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왼쪽부터)
미국 블룸즈버리 USA에서 출간된 조경란의 <혀> 표지
미국 크라운 출판사에서 출간된 한강의 <채식주의자> 표지
영국 판북스에서 출간된 이정명의 <별을 스치는 바람> 표지
스티븐 킹 vs. 한국작가. 내가 뉴요커라면 한국작가 소설을 고를까?
그는 95년 3월 임프리마코리아에 입사해 해외 출판 저작물 국내 수입 업무를 하다가 2005년 김영하를 시작으로 그가 꿈꾸던 한국 문학 수출을 감행한다. KL매니지먼트라는 저작권수출 전문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어느덧 우리 문학도 세계 진출의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외국 진출 기반이 취약한 한국에서 우리 문학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예를 들어 어떤 미국 뉴욕 독자가 20불을 지갑에 넣고 반스앤노블에 갔어요. 판매대에 한국에서 온 작가와 스티븐 킹이 쓴 소설이 나란히 있다면 어떤 책을 택할까요? 스티븐 킹의 작품을 고르겠죠. 내가 아는 그곳 독자에겐 한국이라는 나라도, 한국작가 이름도, 소설도 낯설 거예요. 그럴 때 내가 낯선 작가 책을 손에 들 확률은 굉장히 낮아요.” 이때 ‘한국에서 최고’라는 기록은 영예롭긴 하나 독자 마음을 움직이는 무기는 될 수 없다. 관건은 철저히 진출 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자질을 갖고 있는가의 여부다. 이구용은 “독자가 지갑을 열고 우리 작가의 책을 구입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미국 작가가 쓰지 못한 것, 미국 작가가 내지 못한 목소리. 적어도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출판시장도 불황이에요. 그쪽에서 한국 책을 출판하려면 번역도 해야 하고, 잘되지 않았을 때 오는 결손은 다 책임져야 해요. 그럴 때 편집자 마음을 확 이끌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하죠.”
현지 독자·편집자 입장에서
이런 척박한 상황과 극소의 가능성을 뚫는 그의 무기는 수십 년 쌓인 경험에서 우러난 감(感)이다.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태국,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일본 등의 국가를 매년 방문해요. 방문시 현지 출판물이나 관계자들을 주로 만나지만 그러면서 다른 나라 사정도 듣게 되죠. 어떤 책이 잘 팔리는지, 또 어떤 책을 수입하고 수출 하는지를요.”
미국에선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지만 한국에서는 반응이 별로였거나, 반대로 미국에선 반응이 별로였지만 한국에서는 불티나게 팔리는 책도 있다. 이런 경험 데이터가 누적된다. 과학적 분석 보다는 피부로 경험해온 것들이 선택에서 발현된다. 그간 각국 작가들의 대표 작품들을 보면서 그 나라의 문학적 수준. 그들의 문학이 글로벌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반향을 주는지의 미세한 정보들도 쌓였다. 그런 베이스 위에서 그가 우리 작품을 읽을 때 그만의 레이더가 가동된다.
“무엇보다 우선 현지 독자, 편집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게 중요해요. 수출 작품을 결정할 때 기준은 가장 기본적인 작품 완성도가 49%라면. 독자·편집자가 이 책을 구매할지, 번역 판권을 살지의 여부가 51%예요. ‘이런 스타일을 가진 작가는 프랑스에서 어필을 하겠다’, 반대로 ‘이런 스타일은 나가기가 어렵다’는 식으로 걸러져요.”
지역마다 접근 전략이나 방식도 각기 다르다. “아시아권에 비해 영미권 독자들에게 수출하는 건 더 긴 시간과 세심한 전략이 필요해요. 아시아권엔 한국문화나 언어에 능숙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한 책을 제시하면 알아서 검토하죠. 하지만 영미 유럽은 찾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 밥상 차려줘야 해요.”
(왼쪽부터)
미국 랜덤하우스에서 출간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표지
팰그레이브 맥밀런에서 출간된 안도현의 <연어> 표지
번역, “Not bad나 Good 아닌 Excellent여야”
번역은 일찍이 한국 문학의 해외 수출을 거론할 때 민감한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이구용 대표 역시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단순히 ‘이 정도 수준이면 괜찮다’로는 안돼요. 미국 독자는 한국에서 넘어온 번역서라는 걸 의식하고 보지 않거든요. 번역이 나쁘진 않은데 뭔가 좀 어색하다면 그들이 원하는 번역이 아닌 거예요. 번역 원고는 반드시 같이 일해 봤고, 현지에서 긍정적 반응을 얻은 역자에게만 의뢰를 해요. ‘Not bad’나 ‘Good’이 아니라 ‘Excellent’한 것이어야 해요. 번역이 엉성하다면 아무리 문학성 높고 좋은 작품이라 해도 소용없게 되어 버려요.”
책 출간 여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처음부터 완역하기 보단 초반부 20~30페이지 번역을 하고, 현지 업계 전문가들의 반응을 보고 결정한다. 읽은 뒤 반응이 ‘Excellent’면 진행이고, 바로 답이 안 나오면 출간은 유보된다. “요즘엔 아주 충성스러운 독자가 아닌 이상 재미없는 걸 끝까지 다 읽지 않아요. 서점에서 조금만 넘겨보다가 내려놓죠. 그런 상황에서도 승산 있는 작품만이 (미국 출판계 번역물 시장인) 2%에 들어가요. 제가 소개한 작가 중 열 개 이상의 나라에 작품이 진출한 경우는 김영하, 조경란, 신경숙, 공지영, 이정명, 한강, 안도현, 황선미 등이 있어요. 이 작품들은 출간되었다는 것만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마땅해요. 일부 판매부수가 부진했어도 최소한 외국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요소가 있었던 거예요. 게다가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 이상 나라에 팔렸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예요.”
세계적으로 인지도 있는 주요 문학상 작가들은 적어도 열다섯 개 이상 나라에 판권이 팔린 경우다. 이 대목은 상업적 성공이나 세계 여러 국가 독자들과 소통하는 과정이 결코 작품의 완성도와 별개일 수 없음을 말해준다. 이구용 대표는 이정명의 <별에 스치는 바람>이 ‘인디펜던트해외문학상(Independent foreign fiction prize)’ 후보 지명을 거론하며 “문단/비문단의 울타리없이 환타지 문학, 장르문학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균형 있게 검토하고 존중하고 인정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소설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 판권이 미국 유명 출판사에 나갔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모두는 기뻐했다. 한 권의 책이 물리적 국경을 넘고, 언어의 장벽을 넘어, 타문화권 독자와 활자로 만나는 책의 여정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돌이켜 보았다. ‘순수’도 ‘대중’도, ‘문단’도 ‘비문단’의 울타리를 넘어 엄정한 ‘독자들의 눈’이 지배하는 세계. 물론 이구용과 같이 책과 작가의 뒤편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에이전트들의 빠른 발걸음, 따뜻한 열정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2015. 7. 10 북DB
http://news.bookdb.co.kr/bdb/starCast.do?_method=detail&sc.webzNo=23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