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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May 27. 2021

‘너’ 없이 존재하지 않는 도시… 허수경 시인의 뮌스터

<너 없이 걸었다> 출간 허수경 시인 인터뷰


독일로 이주해 23년간 살고 있는 허수경 시인이 뮌스터를 배경으로 한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를 냈다. 매 장마다 하나의 장소를 중심으로 그곳의 풍경과 사람, 역사와 문화를 글로 풀어내고, 그가 번역한 시 한편씩을 배치했다.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를 읽으면 생전 발 디딘 적 없는 뮌스터, 그곳의 생전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아주 깊은 관계를 맺은 것 같은 착각 속에 황홀해진다. 이 책으로 인해 뮌스터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 영원히 가지 않을 곳, 하지만 속속들이 잘 아는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과 깊이를 꿰뚫는 능력을 가진 시인의 밝은 눈에 감사하며, 전자메일로 책에서 파생된 몇 개의 질문을 던졌더니 문장 하나하나가 시 같은 대답들을 보내주었다.



“시를 쓰는 순간... 익숙한 것들이 어느 날 불려 나오는 것”

Q 책을 읽으며 선생님의 생활 어느 구석에서 이런 장면들을 마주친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뮌스터에서의 작가님의 근황과 일상이 궁금합니다. 고고학 박사 과정은 마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독일대학은 박사 논문이 출판되고 나서야 학위를 인정하는데, 2008년에 책이 나왔으니 마쳤습니다. 뮌스터는 1994년에 와서 공부를 하고 연구소 생활을 하면서 살았던 곳입니다. 제가 공부하고 일하던 연구소는 이 에세이의 배경이 되는 뮌스터 중심가 (이 에세이에 나오는 것보다 뮌스터는 훨씬 더 큽니다.)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시간 동안 그 중심가는 제 생활의 중심이었지요. 그때는 새벽에 연구소로 와서 한밤중에 기숙사로 돌아가기를 반복했어요. 그러니 그곳에서 잠 자는 것만 빼고 지냈던 셈입니다. 몇 년 전에 뮌스터에서 15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알텐베르게’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뮌스터에 들릅니다. 고고학 공부에서는 이제 벗어났지만 연구소에 가서 책들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뮌스터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사기도 하고 박물관, 화랑 등등을 돌아다니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지요. 아직 뮌스터는 제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제가 사는 마을과 사귀고 있는 중입니다. 이 마을은 작지만 공기도 좋고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아서 숨 쉬기가 훨씬 좋습니다. 집 뒤에 있는 숲으로 산책 가기, 들판으로 나가서 양이나 어슬렁거리는 소들을 바라보기 등등.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상 앞으로 갑니다. 읽기도 하고 쓰기도 하는 생활. 글 쓰는 사람들도 생활인입니다. 시간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하루가 그냥 가기 때문에 하루에 일정 시간은 언제나 읽고 쓰는 시간으로 정해두고 일하고 있습니다.   



Q “독일에 간 것도, 그리고 고고학을 공부한 것도 시어를 찾고자 함이었다."라고 쓰셨는데요. 과거의 유물을 발견하는 일과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는 시쓰기라는 행위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까?



제가 그런 말을 했네요. 진심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유물은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다가 불려나온 것이지요. 시어들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원래 우리가 알던 말입니다. 잊어버렸을 뿐이지요. 어느날, 어느 순간에 문득 돌아오는 것입니다. 시인이 시를 쓰는 순간은 대단한 순간이 아니라 익히 알고있던 것들이 어느날 불려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터키에서 발굴을 하다가 못 4개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못 4개가 무슨 대수로운 유물이라서 기억에 남은 것이 아니라 그 못이 사용된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나무관이 있었는데 나무관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 썩어버린 반면 못은 철로 만든 것이라 남아있었던 거지요. 철못 4개. 그 못을 보면서


송찬호


시인의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라는 시를 떠올렸습니다. 송 시인은 발굴이라는 것을 해보기도 전에 이미 발굴언어를 습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질투도 조금.).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Q 일전에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상생활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면서 우리 말로 사유하는 일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긴장감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이 긴장감 속에서 균형을 맞춰가는 건 어떤 느낌인가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생각은 우리말로, 말하는 것은 독일어일 때, 아니면 거꾸로일 때도 있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독일인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친구가 이 말을 좀 전달해줘, 라고 하길래 그가 한 말을 독일인들에게 하는데 친구도 독일인들도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겁니다. 이게 뭔가, 했더니 친구가 하는 말.


“너, 지금 나에게는 독일말로 하고 저 분들에게는 우리말을 하고 있어.”



말이 혼동될 때가 많으니 어지러울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두 언어와 사는 것은 그만큼 세계를 넓힌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니까요. 독일어로 된 글들을 읽을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이번 책에 그래서 독일어로 쓰여진 시들을 번역할 줄도 알게 되었으니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지요.




‘너없이 걸었다‘... 자신을 새로 정의해야 하는 어려움

Q 매 장의 서두에 ‘시’를 배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데엔 시에 대한 모종의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시가 한 도시와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다 보시나요?

시들을 읽으며 도시의 역사, 생김새, 사람들이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시 뿐 아니라 다른 문학작품이나 좋은 영화들도 그렇습니다. 문학작품 속의 배경이 된 도시들은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마치 아는 곳처럼 생각되기도 하지요. 이를테면 제게는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그랬고 김승옥 선생의 <무진기행>이 그랬습니다. 제가 쓴대로 이준규 시인의 <삼척 0>을 읽으며 삼척으로 가는 기차소리를 듣는 것, 그런 어떤 것. 어떤 시들은 도시에서 사는 시인들이 쓴 것이니 그들의 삶의 터전과 관계가 많겠지요.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은 그가 만일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 살았더라면 이런 글들을 썼을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보들레르가 그 시대에 파리에 살았던 것은 파리라는 도시의 행운이었겠지요. 시골에서 사는 시인들의 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는 곳이 어디든 시는 나옵니다. ‘시는 삶 속에서 나온다‘는 클리셰에 가까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Q 시인의 생애도 글 내용에 종종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를 읽을 때 창작자의 전기를 함께 챙겨보시는 편인가요?

예. 특히 지금 이 지상을 떠난 작가들의 생애를요. 요즘은 카프카의 청년시절에 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물론 전기 역시 일종의 해석이기 때문에 시읽기 그것 자체를 방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시를 읽는다는 건 시가 쓰여진 시대를 읽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전기를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Q 제목이 ‘너없이 걸었다’입니다. 내용 중에도 끊임없이 나와 너가 등장해요. 작가님에게 ‘나’와 ‘너’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주신다면?

이렇게 질문을 하시는 분에게 ‘너’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입니까? 다들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라서요.

우리는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입니다. ‘너’에 의해서 내가 정의되는 경우가 많지요. 외국에 갑자기 나오게 되면 갑자기 ‘너’가 없어집니다. 외국에서 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내가 생기려면 시간이 아주 걸리기도 하고 아니라면 언제나 옛날의 ‘너’가 아직도 ‘너’이기도 합니다.

‘너’는 또한 ‘나’이기도 합니다. 내가 바라본 너이니까요. 내가 바라보고 너라고 생각한 이가 너이니까요. 너는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너 없이 걸었다’입니다. 자신을 새로 정의해야 하는 존재의 어려움, 망설임, 그런 마음이 이 제목을 만든 것 같습니다.

Q 오래된 도시 뮌스터에 계속 머무르다보면 끊임없이 변하는 서울이 신기하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뮌스터와 비교해 지난 번 방문 때 서울의 인상이 어떠하셨는지요?

서울은 빠르지요. 뮌스터에 비하면 너무나 큰 도시이기도 하니까 비교하기는 곤란하지만 굳이 말을 한다면. 저의 고향은 진주라는 지방도시인데 진주에서 태어나 살다가 서울로 처음 갔을 때, 그때와 마음이 비슷했습니다. 세련되고 복잡하고 술렁거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언제나 다들 혼자인 것 같은 도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를 저는 사랑합니다. 제가 사랑하고 신뢰하는 벗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Q “‘저 쇼핑백에 든 옷들은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튀니지 등등 임금이 낮은 곳에서 온 것들이다. 실과 섬유에서 나온 먼지와 후덥지근한 공기 속, 지옥 같은 시간을 재봉틀 앞에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이다.”(p.125) 이것처럼 감성적인 도시 묘사 중간중간에 현실적인 시선이 문득 개입하는 때가 있는데요.

예. 제가 뭐 특별히 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선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어렵고 억울한 이들을 향하는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그렇습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시낭독회, 굴뚝으로 올라간 해고 노동자들을 위한 발언들, 희망버스 등등. 많은 시인들이 우리 사회의 약하고 억울한 이들을 위해 일을 합니다. 저는 독일에서 살다보니 독일처럼 부자나라가 아닌 더 가난한 나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정경제 시스템이 부당하다는 것은 제가 첨언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요. 우리들 역시 그 시스템의 일부입니다. 나 자신보다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최소한의 몸짓이지요.

우리들은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는 않습니다. 과감히 자신의 이익을 뒤로 하고 타인을 챙기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를 우리 자신이 믿었으면 합니다.


여전히 뮌스터를 걸으며...

Q 뮌스터에 갈 수 있는/없는 독자들이 이 책에 실린 시와, 선생님의 에세이, 지도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용법을 알려주세요.

천천히, 천천히, 읽어 주십시요. 읽다가 덮고 잊고 있다가 다시 펴보면서 가지 못한 곳을 마음 속에 집어 넣어주시기를. 그 낯선 곳에 누군가 걷고 있을거라 생각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Q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제 저는 뮌스터에 집이 없지만 여전히 뮌스터를 걷고 있습니다. 책에는 미처 쓰지 못하는 구석을 걷기도 하고 새로운 구석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지금 계획은 내년에 시집을 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될지... 다른 계획은 읽고 쓰고 사는 것, 그러다가 ‘너’를 다시 정의하는 것입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멀리 있는 저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해 주셔서 저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곧 만날거라는 약속을 드리고 싶지만 삶은 또 우리를 어디론가로 데려갈 것이기에...

사진제공 : 난다


- 북DB 2015.9.14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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