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부아르> 출간 피에르 르메트르 인터뷰
56세의 나이에 작가로 데뷔한 피에르 르메트르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빠르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위 ‘대세’ 작가에 속한다. 추리소설 역사상 최단신인 145cm의 매력적인 형사반장 카미유가 등장하는 ‘베르호벤 3부작’(<이렌>, <알렉스>, <카미유>), <웨딩드레스>, <실업자> 등의 장르소설로 하나의 봉우리를 정복했다면, 2013년에는 <오르부아르>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타면서 또 다른 봉우리의 정상에 섰다.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저절로 궁금증이 왔다. 베르호벤 3부작 속 단신 형사 카미유를 닮았을까? 아니면 <오르부아르> 속 약간 빈틈 있지만 심지가 굳은 알베르를 닮았을까? 이런저런 모습을 그려보며 인터뷰를 준비했다. 때론 그의 재치있는 반문으로, 때론 프랑스인 특유의 익살 어린 답변과 함께 인터뷰는 진행됐다. 공교롭게도 인터뷰를 한 날은 파리 테러가 일어나기 불과 사흘 전이었다. 큰 비극적 사건을 겪으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사건이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여러 감회에 휩싸여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보는 그의 시각이 담긴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다.
"소설은 다양한 인용구들의 합체"
Q 26세에 커뮤니케이션 교육 서비스 회사를 차린 후로, 계속 문학 강의를 해오셨죠. 56세의 나이에 작가로 데뷔해 큰 성공을 거둔 늦깎이 작가신데요. 작가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꽤 특이한 경력을 가지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퇴직 후에 택시기사가 되는 것엔 아무도 의문을 갖지 않지만, 소설가가 된다면 특별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소설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직업인데도, 제가 56세에 데뷔한 것이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놀랍게 다가오나 봅니다. 물론 독자들이 왜 궁금해하는지에 대해서 이해는 갑니다. 작가는 제 어렸을 적부터의 꿈이었어요. 죽기 전 어렸을 적 꿈에 한번 도전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우회하긴 했지만, 다행히 좋은 편집자를 만나 제가 펴낸 책들이 인기를 끌 수 있었죠.
Q 장르소설의 경계를 벗어나 쓰신 작품인 <오르부아르>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까지 수상했는데요. 이러한 성공을 예감하셨나요?
작가의 재능이나 노력은 사실 작가로서의 성공에 거의 작용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저의 성공에는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행운이 생기길 희망할 순 있겠지만, 운에 대해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죠.
Q 작가님의 대표작인 베르호벤 3부작에서 매력적인 캐릭터 카미유 반장을 탄생시켰습니다. 카미유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있는 능력 있는 형사인데요. 이 캐릭터에 작가님 자신의 성격이 어느 정도나 투영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또 참고한 외부 인물이나 캐릭터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사실 이런 캐릭터를 만들 때 누구를 정확히 따왔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가 캐릭터를 만들 때는 옆집 이웃이나, 지금 앞에 계신 통역사님이나 기자님처럼 많은 인물을 복합적으로 반영해서 인물과 상황을 만듭니다. 저조차도 소설을 쓰고 나서도 이 인물이 딱 누구에게서 왔다고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이것이 기자님껜 아쉬운 답변이지만 소설가로선 최선의 답변일 것 같습니다.
Q 작품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보통 작가들이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표현한다면, 작가님은 마치 논문에서 참고문헌을 밝히듯 구체적으로 차용했다는 점을 공개하시는데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책 말미에 언급한 작가 중엔 제게 영향을 준 적이 없거나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아닌 경우도 많아요. 가령 <오르부아르> 감사의 말에서는 두 명의 작가에게만 별도로 감사한다고 언급했고, 그 뒤에 작가들의 이름을 나열했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른 경우라고 보시면 됩니다. 소설가로서의 인생에 중요성을 지니는 작가가 있는 반면, 단순히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읽은 표현, 단어, 인물, 단순한 이미지가 저의 이야기에 잘 맞아떨어져서 생각나서 넣은 경우도 있어요.
예를 들어 볼까요? <오르부아르> 끝 부분말에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해 언급을 했어요. 작품에서 한 인물을 묘사하면서 ‘그 순간 가슴이 찢어지는 것에 짜증이 났다’는 표현을 썼어요. 이 표현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나서 찾아보니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 봤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시구로의 작품 주인공 스티븐슨은 감정 표현을 잘 안 하고 감추는 딱딱한 사람인데, 그가 한 여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쓰인 표현이었습니다. 사실 표현이란 것엔 특허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시구로 작가의 이름을 감사의 말에는 언급했지만, 그에게 빚을 진 것은 아니니 별도로 보상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Q <이렌> 도입부에 “작가는 따옴표 없는 여러 인용구들을 효율적으로 짜 맞추는 사람이다”라는 롤랑 바르트의 문장을 배치하셨죠. 이 문장이 작가님이 앞에서 말한 신념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해요.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 말하는 바는 작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저 역시도 작가는 이곳 저곳에서 많이 영향을 받는 사람이며, 소설 역시 다양한 인용구들의 합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추리소설은 인간의 중심에 대해 질문하는 문학"
Q 과거에 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문학 수업을 해오셨습니다. 그때의 경험도 작품을 쓰는데 일정 부분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요.
네. 그렇습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읽는 것과 남을 가르치기 위한 독서는 다릅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정확도가 높아야 하고, 깊이도 있어야 하죠. 흥미를 위해서는 표면만 읽으면 되지만, 가르치기 위해서는 굉장히 기술적으로 읽어야 했습니다. ‘소설분석’이라는 주제로 일주일 동안 세미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일주일 동안 시계를 해부하듯 한 권의 책만 파헤쳤습니다. 많은 소설 기법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처럼 서른 살 때 책을 썼다면 아마 지금보다 완성도가 덜 높은 작품을 내놨을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좀 늦게 작품을 쓴 것과, 가르치는 경험을 통해 작품을 깊게 읽는 훈련이 합쳐져서 다른 작가들의 두 번째 세 번째 작품 수준이라는 평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작품이 성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 문학 수업을 하실 당시엔 현대 문학을 주로 가르치셨는데, 데뷔작은 장르문학이었습니다. 특별히 장르문학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추리소설은 인간의 비극을 다룹니다. 상대방을 원하고, 소유하고자 하고, 살해하고, 정의를 피하는 것 등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많이 다루죠. 욕망, 돈, 권력 등 넓은 주제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저는 추리소설이 굉장히 순수한 비극문학이며, 인간의 가장 중심에 대해 질문하는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Q 제1차 세계대전 이야기를 다룬 <오르부아르> 초반부엔 참혹한 전쟁 장면이 등장합니다. 베르호벤 3부작을 포함한 장르소설들에도 살인이나 폭력 등 잔인한 묘사가 자주 있고요. 이 두 폭력 간에 어떤 차이점이 있다고 보시나요?
굳이 말하자면 전쟁은 집단적인 폭력이고, 추리 소설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많은 사람이 제 작품 속 폭력이나 참혹한 장면에 대해 질문을 자주 하는데,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더 깊이 들어가면 또 다른 질문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제가 과연 ‘정신병자’냐고 묻는 것처럼요. 일 년에 걸쳐서 300건 이상의 잔혹한 장면이 있는 추리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서, 일 년에 겨우 두 세 개의 잔인한 장면을 만드는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이상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여성 독자가 왜 그렇게 잔혹한 소설을 쓰냐고 물어봐서 그때 저는 독자인 “당신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독자에게 역으로 “그 잔혹한 장면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는지, 중간에 혹시 중단하지는 않았는지”를 질문했더니 “끝까지 잘 읽었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런 걸 읽는 데 흥미를 느끼는 게 오히려 더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소설을 쓰는 게 제 직업이니 저로선 변명거리가 있는 셈이지만, 그분은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Q 강력한 캐릭터 묘사와 감정선을 이끌고 나가는 기술은 마치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영화가 작가님의 글쓰기에 영향을 준 부분이 있나요?
<오르부아르> 1부에 ‘말’이 등장하는 부분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니 이건 단순한 인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이 질문이 저에게 좀 다른 생각도 들게 하네요. 역설적으로 저의 글쓰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인은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인터뷰집에서 히치콕이 자신의 인생에 관해 하나하나 상세하게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영화별로 깊은 분석과 함께 이야기를 전개하는 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치콕은 영화에 관해 얘기한 그 방법이 소설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책에서 많은 조언을 얻었습니다.
Q <실업자> 등의 작품에서는 ‘일’이 주인공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실제로 삶에서 일에 많은 비중을 두는 타입인가요?
네. 저는 일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선택권이 있고, 즐거워서 일을 합니다. <실업자>는 일보다는 기업에 초점이 맞춘 작품으로 기업의 횡포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곧 일본에서 번역될 예정인데, 일본이야말로 기업의 횡포가 개인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나라이기 때문에 출간됐을 때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 몹시 궁금합니다.
<실업자>라는 책은 전 세계적으로 기업이 직원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쥐고 있다는 전제 아래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 책 속에 나오는 잔인한 장면들이 적어도 ‘열린’ 장면들이라면, 기업의 잔인성은 숨기고 은폐된 경향이 있습니다. 프랑스 기업에서도 5층 건물 창문으로 떨어져 자살한 직원이 생겨나고 있을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즉 오늘날 기업이 내 책보다 훨씬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이 잔혹하다는 사람에게 저는 노동계를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Q 이번엔 <오르부아르>에 대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오르부아르>로 공쿠르상을 탔을 때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기자분께서 ‘알베르 롱드르 상(프랑스 언론계 최고 권위의 상)’을 수상했을 경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Q <오르부아르>의 시대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입니다. ‘파리 매치’와의 인터뷰에서 이 시기를 택한 이유로 이 소설 속 시대 배경과 오늘날 간에 ‘불안정함(précarité)’이란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불안정함‘이란 상황에 대해 더 구체적인 부연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작품 속 배경인 1920년대 프랑스와 오늘날의 프랑스는 모두에게 기회를 주거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사회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불안정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저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와중에 저처럼 구제를 받은 사람이 있고, <실업자>에 나온 캐릭터처럼 벌을 받는 사람도 있고요.
Q <오르부아르>를 쓰는데 2,000시간을 들였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들인 시간 중에선 자료 조사에도 많은 공을 들이셨을 것 같습니다. 이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셨습니까?
1920년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중점적으로 파악하려 했습니다. 당시 역사적 사실을 왜곡 없이 알고, 소설 속에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습니다. 일차적으로 배경을 정하고, 스스로 던진 질문은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였습니다. 여성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차가 길거리를 다녔는지, 빵은 얼마였는지 이런 디테일을 조사하면서 독자들이 소설에 빠졌을 때 그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했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한 작업은 당시의 일간지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1918년~1919년의 일간지는 운 좋게도 디지털화되어 있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Q. 장르문학과 순문학 모두에서 성취를 이루셨고 또 전 세계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작가로서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번 성공이 반짝 성공될까 두렵기도 하고 2~3년이 지나서 인기가 시들해지거나 독자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기 작가가 인기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집필을 하는 것, 또 여기에 더해서 제가 집필한 작품을 책으로 펴낼 수 있는 출판사를 만나는 것이 저에게는 큰바람입니다.
사진 : 기준서(스튜디오춘)
북DB 2015.12.4 게재
http://news.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sc.mreviewNo=61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