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인 블랙, 맨 인 블랙 2, 맨 인 블랙 3
지우는 게 낫다고 느껴지는 기억도 있다. 불필요한 순간에 다시 돌아와 애써 진정시켜 놓았던 마음이 흔들리고, 하던 일에 대한 집중이 흐트러질 때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혹은 너무 많은 일들이 쌓여 새로운 일들을 맞이하기에 벅차다는 느낌이 들 때도, 그냥 다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진다.
영화를 보며 현실에서 벗어나는 시간은 관객이 바라던 망각의 욕구를 일시적으로 실현해준다. 이야기에 몰입한 시간 동안 등장인물의 상황에 번갈아 이입해보며 원래 내 상황을 잊게 된다. 상영시간이 갈수록 길어지는 영화들의 모습은 할 얘기가 많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은 감독들의 마음과, 밖에서의 시간이 더 힘들어져 일탈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어졌으면 하는 일부 관객의 마음이 들어맞은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맨 인 블랙> 시리즈는 즐거운 이야기로 관객의 고민을 잠시 덮어주면서도 그 고민의 내용을 다뤄준다. 외계인들이 지구에 숨어 산다는 음모론을 기초로 한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에이전트 J와 K의 버디 무비로서 재미있게 진행된다. 동시에 사건의 핵심에 기억을 두어 그 의미를 전한다. <맨 인 블랙>(1997), <맨 인 블랙 2>(2002), <맨 인 블랙 3>(2012)는 넓은 시간을 걸쳐 재미를 유지하며 그 마무리에서는 감동까지 만든다.
맨 인 블랙 요원이 하는 주된 임무는 외계인들이 지구 사회에 잘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위한 첫 번째 과정으로, 자신을 사회에서 지운다. 복잡한 면접을 걸쳐 신입 요원으로 발탁된 제임스는 이름을 지우고 J가 되며, 지문과 기록을 제거해 검색되지 않는 인물이 된다. 어떤 일이 발생해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한 과정이면서, 정보와 연계되는 기억으로부터 인물들을 독립시키는 과정이다.
인물들이 지우는 것은 자신의 기억만이 아니다. 아직도 수많은 매체에서 패러디되는 뉴럴라이저는 사건을 목격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순간적으로 지워버려,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후속적인 충격을 방지한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지워 사건을 은폐하고 해결하는 것이 주된 임무이지만, 매 편 발생하는 사건의 중심에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시리즈의 첫 시작에서, 에이전트 K는 에이전트 D와 활동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흉폭한 외계인을 제압한 뒤, D는 오랜 요원 생활로 감춰지고 잊히는 삶에 지쳐 은퇴를 위해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한다. 작품에 처음 등장한 뉴럴라이저의 사용으로, D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다. 반면 K는 여전히 요원으로 남아 새로운 파트너 J를 찾고, 다시 한번 위험한 외계인을 처리하는 길에 나선다.
그러나 K 역시 딱딱한 업무 태도 속에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을 가리고 있었다. 특히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떠나게 된 아내를 항상 그리워하였다. 가려져 있던 K의 꿈은 다시 위험한 외계인을 제압한 뒤 실현된다. 선임 요원을 은퇴시킨 것처럼, K는 J에게 기억 삭제와 은퇴를 부탁한다. 오랜 업무로 쌓인 무거운 정보들을 지우고서야 K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기억을 삭제하는 형태로 표현되었지만, 두 차례의 기억 삭제는 오히려 인물들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기억되고 싶었는지,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는 일이 관계와 안정적인 삶의 유지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맨 인 블랙 2>에서는 반대로 기억을 되찾는 방식으로 기억의 가치를 보여준다. J는 K의 은퇴 이후 새로운 파트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은퇴시키고 있었다. 때마침 25년 전 사건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던 K가 필요하게 되자, 그의 기억을 복구해 업무로 돌아오게 한다.
머릿속에서는 기억이 지워졌지만, 요원으로서의 삶의 방식과 태도는 모든 행동에 남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부터 그를 방해하고 있었다. 오히려 기억을 되찾고 나자 가장 익숙한 행동들이 적합한 자리를 찾아 성공적인 임무 수행으로 이끌게 만든다. 끔찍한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요원 업무 내용은 그의 삶에서 더 중요한 영역이었으며, 이에 대한 망각은 문제의 해결보다는 회피에 가까웠다. K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사람 역시 그를 이해하지 못하며 사랑의 방향 또한 맞지 않던 옛 아내보다는 그와 최고의 호흡을 자랑하는 J가 적합했다. 때문에 K가 J의 파트너로서 완전히 업무에 복귀한 결말은 전편보다 더 희망적이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시리즈의 마지막에서는 그동안 채워지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마지막 공백까지 채워 넣는다. J와 여전히 현장에서 활동하던 K는, 1969년으로 돌아간 외계인 보리스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의 어제 모습을 기억하는 유일한 인물인 J는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인 그를 되찾기 위해 K가 죽은 과거로 향한다.
비어있는 K의 존재를 되찾기 위한 여정이었지만, 여정의 끝에서는 J가 가지고 있던 빈자리가 채워진다. 보리스와 K의 마지막 대결에서, 흑인 대령은 K 대신 희생하여 임무를 성공시킨다. 아버지의 시신으로 다가오는 어린아이는 J였고, K는 어린 J에게 닥친 악몽을 지워낸다. 그리고 죽은 J의 아버지를 영웅으로 소개하며 함께 해변을 걸어간다. 어린 J의 기억은 비록 지워졌지만, 그 파편이 남아 다른 모든 사람이 K를 잊었을 때 여전히 그를 기억하게 만든다.
어떤 기억은 그 순간에는 잊히는 게 나아 보이지만, 결국 각각의 기억들은 인물들의 다음 순간을 만든다. 지워졌던 K의 기억은 막혔던 사건을 해결했으며, 지워진 어린 J의 기억은 사건 해결뿐만 아니라 성장한 J를 다시 맨 인 블랙 요원의 길로 이끈다. 어떤 장비보다 기억을 간단하게 지우는 뉴럴라이저의 존재에도, 기억은 지워졌을 때가 아닌 돌아왔을 때 온전히 힘을 발휘한다.
상영되는 영화를 보며 잠시 멈췄던 기억도, 스크린이 꺼지고 다시 쌓이며 삶을 이어간다. 잠시 지워졌다 돌아와 더 큰 힘을 발휘했던 K와 J의 기억처럼, 영화를 감상하면서 주어진 휴식은 관객에게 나아갈 힘을 준다. 오늘도 다시 영화를 감상하고 곱씹으며 생기는 그 효능을 빌리며, 생활에 지쳐 영화로 돌아오는 주기가 조금이나마 길어지기를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