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당신의 선택은?'
'다운쉬프트(Downshift)족이라구?'
랩탑을 열고 인터넷이 연결되었다는 뜻의 작은 아이콘이 푸른 빛을 발하면 구글 검색창을 열고 <다.운.쉬.프.트.족.>이라고 타이프한 후 엔터 키를 친다. 관련문구가 들어있는 다양한 종류의 정보 창을 손에 잡히는 대로 열어본다.
[다운쉬프트라는 말은 원래 자동차 용어로써 저속 변속(變速)을 의미......경쟁과 속도에서 벗어나 여유있는 자기만족적 삶을 추구......생활의 패턴을 여유롭게 바꾸어 여가를 즐기고 삶의 질을 향상 시켜 만족을 추구......일과 생활에 건전한 균형과 행복감이 넘치는 삶 추구......원하는 형태의 삶을 위해 고소득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뚜렷한 공통점......중산층 전문직이 많은 것도 특징 중의 하나......증권금융업이나 법조계, IT업계종사자들이 많다......연령층은 가족에 더 큰 가치를 두는 30대와 40대가 많다......]
어제 저녁 뉴욕에 사는 미영 언니랑 통화를 했을 때 그녀에게서 이 단어를 처음 들었다.
“너도 <다운쉬프트족>이구나!”
“예, 무슨 족요?”
“다-운-쉬-프-트-족-이라구. 전문직을 가지고 잘 나가던 사람들이 돈은 더 적게 받아도 스트레스를 피해 자기가 선호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요새 그렇게 부르더라구. 최근 유럽에서 시작된 사회현상이라는데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가 봐. 우리 회사팀에도 얼마전에 플로리다에 가서 케잌 데코레이션 비지니스 한다고 그만둔 젊은 여자 하나 있어. 아주 똑똑하고 다부진 여자 였는데. 케잌 클라스 다닌다고 행사 때 마다 케잌 하나 씩 만들어 오곤 하더니 어느날 자기 케잌회사 명함 하나 씩 나눠주곤 정말 떠나버린거 있지.”
언니는 IBM에서 연봉 이십만불을 받고 일하는 수퍼우먼 IT메니저이다. 케잌 데코레이션 비지니스를 위해 떠났다는 여자는 언니가 리더로 있는 IT팀에 수 많은 명석한 두뇌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들어왔던 엘리트였다고 한다. 언니는 그 여자가 떠나버린 것이 못내 아쉬운 듯 그녀가 얼마나 훌륭하게 임무들을 수행했었는지에 대해 장황히 늘어놓는다. 몇 십만불의 연봉을 포기하고 IBM의 IT팀을 그만둔 여자라니! 뉴욕의 산골이 아니라 바닷가를 더 좋아하는 여자였나보다. 자기가 설 곳은 컴퓨터 앞이 아니라 따끈따끈한 빵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탄생되는 오븐 앞과 이벤트가 벌어지는 파티 장소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을 여자. 지금 행복할까 그녀는?
“앞으로 뭘 해볼 생각이니?”
차분한 어조,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내 가슴에 내려앉는 질문의 무게는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친구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긴 했는데……”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마. 우선은 푹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좀 재충전 되면 더 좋아하는 일을 시작할 기회가 분명히 생길거야”
유능하고 따뜻한 사람. 미영언니가 그렇다. 서른 해를 넘게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탁월하게 유능하면서 동시에 마음 깊이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따스함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내 주변에서는 미영 언니가 유일하다. 언니는 자신의 일에 파묻혀 있는 것을 즐기고-어느 정도냐 하면 자신이 배아파 낳은 아기의 존재를 일하는 순간 깜박 잊을 수 있을 만큼!!-그 일을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 세계에서 언니의 존재는 점점 탁월해져가고 경쟁을 위해 목을 메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언니의 직함은 높아져만 간다. 언니는 그저 운전을 즐길 따름인데 회사에서 알아서 가장 최신형의 레이스카로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프로레이서가 된 것처럼.
언니가 나에게 다운쉬프트족이라고 이름 붙여준 것은 언니의 친절함이 묻어난 배려 깊은 말이다. 내가 고소득 연봉을 자랑하는 금융, 법조, IT계의 전문여성이었다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현재 뚜렷하게 건전한 균형과 자기만족적 삶을 제공해주는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명함을 내밀만한 처지도 아니다. 내가 7년동안 일하고 3개월 전 그만둔 회사는 메릴랜드 주 밀러스빌이라는 도시에 위치한 조그만 엔지니어링 회사다. 연봉 9만2천이 내가 그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연봉 액수였다. 그렇게 적은 월급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7년 전 6만8천에 첫 연봉협상을 했던 25세였던 나는 그 사이 32세가 되었다. 머리카락은 윤기가 없어지고, 이마가 더이상 젊음으로 팽팽하지 않은 32세. 9만2천에 내 모든것을 다 내어주고 싶지 않은 나이가 되어 버린 탓일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요.”
회사를 그만두기 몇 달 전 어느 주말 오전, 빨래를 개고 있던 엄마 옆에 앉아 불쑥 던진 말이다. 빨래를 개던 손이 멈추었다. 엄마는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여셨다가 꾸욱 다무셨다. 정적이 흐르자 열어놓은 창 틈으로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먹이가 풍성한 여름이 오고 있음을 축배라도 하듯 여러 마리의 새들이 한꺼번에 재재거렸다. 엄마는 한참 만에 입을 여시곤,
“지금까지 공부한 것 아깝지 않겠니?”
천천히 빨래개기를 이어가는 엄마의 거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견딜수가 없어. 의미도 없이 화학약품 냄새나는 실험실에 아침부터 밤까지 갇혀있는 일 더 이상은 못 하겠어.”
엄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가 더 굳게 입술을 다무셨다. 울 엄마의 좋은 점은 말을 많이 아끼신다는 점이다. 적어도 “결혼은 언제 할래?” 같은 말은 하지 않으신다. 엄마는 결혼제도를 믿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내가 “결혼이나 해버릴까?” 라고 싱거운 말을 꺼내면, 엄마는 “일단 좋아보이는 남자가 나타나면 적어도 삼년은 만나 보고 결혼 할지 말지 결정해” 라고 말하신다. 결혼이 딸의 장래를 보장해주는 보증수표라는 믿음 따위는 전혀 없다.
어쨌든, 이 나이에 결혼을 못해서 소위 말하는 히스테리가 생겼다거나 집에서 스트레스를 준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다. 엄마는 다만 나의 독립적인 삶을 위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라신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될거야.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등불처럼 소중한 존재가 될거야…"
기억에도 없는 순간부터 내내 들었던 나를 향한 엄마의 주문이었다. 아빠가 술에 만취해 “계집애가 쓸데없이 공부는 왜 해?”하면서 내 책상 위의 책들을 잡히는 대로 그러모아 문 밖으로 던져버려도, “낼 부터는 밖에 나갈 생각 하지 말고 엄마 옆에서 집안 살림하는거나 배워!”하고 며칠간 집에 가두거나 할 때에도, 엄마는 잠들기 전 내 머리맡에 앉아 내가 공부를 많이 하고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거라고 속삭이며 내가 훌쩍이다 잠들 때까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하셨다. 엄마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내가 나의 길을 갈 수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다.
엄마는 나의 갑작스런 선고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쩌면 엄마는 이런 종착역을 예상하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내가 공학을 전공했던 이유. 남자에게 기대살지 않기 위해서 남자들이 하는 공부 남자의 직업을 선택했던 것. 우리 형편에 힘들지 않게 학비보조 장학금을 쉽게 받을 수 있었던 분야. 월급을 받으면서 대학원도 다닐 수 있는 분야. 내가 공학을 과학을 좋아하는가 이 분야에서 보람을 느낄수 있는가는 이차적인 문제였다. 그럭저럭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몇 년간의 젊음을 고스란히 바쳐 1인치쯤 되는 논문집과 함께 대학원도 무사히 마쳤다. 문제는 엔지니어로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나 자신의 영혼을 팔아 하루하루 사는 듯 내 내부가 고갈되어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일에 대한 열정의 기반이 너무 얇은 탓이었다.
본격적인 매릴랜드의 후덥지근한 여름 냄새가 실험실에 스며들기 시작했을 즈음, 1초도 더 거기 앉아 있을수 없이 숨이 막혀오던 순간 보스, 월터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 그 다음에 뭘 할지도 모르면서도 나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본부 사무실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실 수 없을까요?”
“무슨 일이지?”
“실험실에서 일하는 것 그만두고 싶어요. 여기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가 되요. 본부에 마땅한 포지션이 없을까요? 실험실 일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지 열심히 할께요.”
“……”
어이없어할 그의 표정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갑자기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한데요. 하지만 진심으로 실험실이 아닌 곳에서 일해보고 싶어요”
“수지, 이번 <에어포스 로켓엔진 인젝터 프로젝트>가 3개월 뒤면 끝나. 조금만 더 견디고 그때 가서 이야기 하자. 그래줄 수 있지?”
“아니오. 3개월 더 이렇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왔어요. 보스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제가 너무 숨이 막혀 여기 더 이상 못있겠어요.”
“뭐가 문제지? 왜 진작 의논하지 않고 갑자기 이러는거야?”
“문제는……”
누군가의 쫓김을 당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진다. 불끈 용기가 솟아 그의 사무실 전화번호를 꾸욱 꾸욱 누를 때의 기백은 어디가고 침이 마르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내 머릿속에 도는 말들은 너무 많은데, 그가 납득할만한 적당한 대답을 집어낼 수가 없다.
“문제는 바로…화학약품을 더이상 만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예요.”
“우리는 그렇게 치명적인 화학약품을 쓰고 있진 않는데? 그리고 그런 약품을 안전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것이 화학공학도들이 학교에서 받는 트레이닝 아닌가?”
그의 목소리에 순간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가장 타당하게 들릴 수 있는 답일거라 퍼뜩생각해 낸 대답인데 화학공학 전공자로서는 정말 바보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런 환경에 있는게 저에게 스트레스가 많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젠 되돌릴 수도 없으니 끝까지 가본다.
“그럼 수지는 더 이상 여기서 일하면 안되겠군. 당신이 원하는게 정말 실험실에서 일하는걸 그만두는거야?”
“네.”
보스의 고드름이 떨어질 듯 냉기 서린 질문에 다른 답을 찾지 못하고 결정적인 대답을 하고 말았다.
“당장 본사 내 사무실로 오게. 켈리에게 사직절차를 밟도록 지시하겠네.”
이것이 다시는 되새기기 싫은 구두사직서가 되어버린 대화였다.
내가 7여년을 보낸 그곳에서 더 이상 있기 싫어졌던 것은 그 회사 탓은 아니었다. 업무분량이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정도 혹은 그 이상의 일중독 생활을 하지 않는 엔지니어는 어디서든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러한 오버타임 스케쥴을 회사가 공식적으로 강요한 적도 없다. 한가지 유일한 책임이라면 7년 전 나를 고용했었던 것이겠다. 그때 이 회사든 어느 엔지니어링 랩이든 나를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른 길로 갔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공부한 것이 아깝다고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아! 그 회사에서 정말 싫었던 것이 하나 있기는 있다. 그 랩을 나와 오른쪽으로 난 복도를 열 발자국 걸어가면 있는 그 화장실 거울! 그 거울이 정말 싫었다.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누렇게 뜬 얼굴, 가늘게 얼기설기 얽힌 붉은 실핏줄로 광채가 가려진 눈빛, 끝이 갈라진 칙칙한 머릿결…… 시간이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는 그 느낌이 견딜수 없이 하루도 더 회사에 나오기 싫을 만큼 싫어졌다고 하면 내 보스는 뭐라고 했을까? 전 회사 직원들과 돈을 거두어 백설공주같은 하얗고 보송보송한 붉은 혈색의 여인 모습만 나타나는 마법의 거울을 사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다. 바짓 단에 밴 기름때도, 각종 화학약품들이 튀어 군데군데 색이 바래고 소매끝이 타들어간 실험가운도. 매일저녁 실험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어둑한 밤 하이웨이를 1시간씩 달려야 하는 일도. 머리를 뜯으며 밤새 논문을 쓰는 일도. 내가 정말 열심히 살고 있다고 느껴져 뿌듯하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넝마처럼 낡고 벙벙한 실험가운에 갖혀 밤낮으로 기계하고만 씨름하는 일상이 싫어졌다. 급속도로 빠르게 변하는 테크놀러지의 세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숨쉴 틈 없는 일과 속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점점 큰 소리로 메아리쳐 올라오는 울림이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살고있는 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공허한 마음이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수주의에 머리를 흠뻑 적시고 있던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과학 발전을 통한 조국의 경제력 강화>라는 명분이 있었다. 내가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맡아 진행하던 대부분의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하던 자금들은 미 국방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다름아니라 미 국방부 산하 군 연구소의 진두지휘 하에 진행되고 있던 방위산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배당되었던 주 업무였다. <새로운 조국의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라는 사명감이 내 가슴팍에 새겨지기엔 머리도 가슴도 너무도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첫사랑의 열병이 지나고 나면 절대 다시 재현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새 나라에서 전공을 살려 내 인생의 정착>이 내가 그 회사에서 청춘의 황금기를 보낸 보다 진솔한 이유일 것이다.
유명 과학 잡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일도 몇 십만불의 연구자금을 따내는 성과도 이력서에 한줄 빛나는 것 외에 가슴깊이 내 삶의 의미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일이 그리워졌고, 다른 옷들을 입고 다른 곳으로 가고싶어졌다. 그리고 남자동료들에 둘러싸여 눈에 쉽게 띄는 마이노리티로 지내는 것도 힘겨워졌다. 여자가 없는 공대생활부터 홍일점으로 지낸 것이 어언 십 수년이 되었지만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결코 적응되는 일이 아니다. 공유할 수 없는 시선의 칼날에 베인 흉터 자국만 늘어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