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이 있었던 날의 일기

내가 20년간 한국에 가지 못한 이유

by 하트온

나는 한국을 좋아한다. 한국어, 한국 문학이 좋고, 한국의 거리들은 운치 있고, 로맨틱하다.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고 정을 나누는 것은 참 따뜻한 느낌이고, 끈끈한 의리가 있어 좋다. 시장 순대, 떡볶이가 너무나 그립고, 대형서점에 죽치고 머물며, 하루 종일 한국어로 된 책 보고, 학용품이나 편지지를 고르고, 요즘 뜨는 음악을 듣고 하는 일을 여기선 할 수 없어서 너무나 아쉽다.


그래도, 막상 올해 한국에 가면 어떨까 하는 구체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굳는다. 2006년, 2016년에 두 번 한국에 갈 진지한 명분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 다 나는 한국을 방문하려던 일정을 취소했다.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여러 가지가 보였다. 정말 어느 작가님이 쓴 표현처럼 '어제 출소한 장기수'같은 기분으로, 지난 20여 년간 한국의 변화한 모습을 감당하는 것이 심리적 부담이 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나는 미국 촌구석에서 매우 느려 터진 삶에 적응해 버렸기에,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사회, 사람들과 맞닥뜨릴 자신이 없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나를 '20년 장기수'로 만든 건 나 자신이다. 미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장기수'로 만들지 않으려 부단한 노력을 한다. 적어도 1-2년에 한 번씩 한국을 나가고, 한국의 소식, 한국의 신문물을 찾아 접하는 일에 발 빠르게 움직인다. 물론 나도 한국 드라마 예능 영화 음악 책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접하려고 노력해왔고, 한국 관련 뉴스도 부지런히 찾아보는 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 일상을 생각하는 건 스스로가 허락하지 않는다.


왜일까.




나는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다. 가장 좋아했던 오빠한테. 그는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던 신혼부부의 막내 동생쯤 되는 그런 존재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는 적어도 중학생 이상이었고, 나는 고작 대여섯 살쯤이었다. 우리 동네 개구쟁이 심술꾸러기 남자아이들과 달리, 점잖고, 착하고, 자상한 성품이 느껴지는 비주얼이라, 어린 마음에도 매우 호감을 느꼈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어른들 앞에서 그 오빠는 나를 잘 데리고 노는 걸로 인정받았고, 나는 그 오빠만은 잘 따르는 걸로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 오빠가 마당에서 나를 데리고 놀다가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그저 잠시 꼬마 데리고 동네 문방구나 다니며 산책하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순한 오빠야가 여시 같은 여자아이 손에 이끌려 나갔다고 생각했거나.


그는 나를 데리고 인적 없는 숲 속- 내 기억엔 나무가 우거져 숲 속이라 기억하는데,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뒤에서 껴안고 내 몸을 구석구석 만지기 시작했고, 결국 점점 파고들어, 나의 소중한 곳을 매우 집중적으로 만졌다. 나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매우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착한 오빠야'와 함께 있어서 좋았는데, 내 몸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오빠. 약자의 몸을 이용해 욕구를 풀고 싶은 '개**새끼'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불쌍한 어린 영혼.


아마도 나는 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자꾸만 오줌 누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이상한 요구를 했던 게 선명히 기억난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타인에게 오줌 누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서 있었다. 나는 싫다고 말했다. 단호하게가 아니라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그 오빠는 점점 더 센 힘으로 심하게 나를 많이 껴안았고, 심하게 내 소중한 곳을 자꾸자꾸 만졌다. 결국 견딜 수 없는 감정의 봇물이 터지고, 내 안에 수치심의 쓰나미가 내 안의 무언가를 파괴하고 쓰러뜨리며 밀려들었다.


그다음의 장면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 울었을 것이다. 그는 우는 아이를 달래 집으로 데려다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성폭행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 같고, 나는 집에 무사히 돌아왔으며, 그 오빠를 다시는 못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몇 번 더 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분명치 않다.


그때 나는 어른들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말하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었는지, 내가 야단맞을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확실한 건, 나는 이 일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40년이 흐른 후, 몇 달 전에 엄마에게 말했고, 독자들에게 두 번째 고백을 하고 있다. 70이 된 엄마는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입술을 깨무셨다. 나는 더 보태지 않아도 힘든 기억이 충분히 많은 엄마에게 40년 전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을 금새 후회했다.


나는 사실 한동안 이 성추행의 기억을 완전히 잊고 살았었다. 중3 때 고입 시험을 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또 한 번의 성추행을 당할 때까지! 이상한 아저씨가 내 등 뒤에 붙었고, 뒷목에 소름 끼치도록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입김이 느껴졌다. 다행히 씩씩하고 용감한 성격의 학교 선배 언니가 같은 버스에 타고 있었고, 그 언니는 내 손목을 낚아채고 자신이 앉아 있던 맨 뒷자리 좌석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몇 정거장 가지 않아 그 언니가 버스에서 내리고, 한 중년 아저씨가 뒤로 걸어오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아까 그 성추행범 임을 알았다. 그 사람 주위로 노란색의 주의 경보 같은 파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집에서 세 정거장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혹시나 그 아저씨가 따라 내렸을까 봐, 있는 힘을 다해 집으로 달렸다. 하지만 나는 그날도 부모님에게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알아봤자, 이미 벌어진 일 해결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을까. 부모가 나에게 도움을 줄 능력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알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후로 정말 수없이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뛰어내려 달렸다. 조금만 느낌이 이상해도, 조금만 눈빛이 이상해도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고, 길에서 말을 걸어오는 낯선 사람과는 말은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때는 정면만 보고 경보 선수 수준의 빠른 속도로 걸었으며,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머물러야 하는 일이 있거나 할 때는, 아예 운동복 바지로 갈아 입고, 전속력으로 뛸 준비를 했다. 나는 매일 몇 키로 씩 뛰는, 선명한 '왕'자 복근이 있는 소녀였다.


문득 글을 쓰다가 성추행이 한 번 더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에 '독서교실'이라는 프로그램에 학교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50-60쯤 되어 보이는 남자 교사가, 책을 읽고 있는 내 윗도리 안으로 불쑥 손을 넣어 내 몸을 마구 만졌다. 내 맞은편에는, '독서 교실 프로그램'에 함께 온, 반은 달랐지만 확실히 얼굴을 아는 남자아이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사실 그 강당에는 각 학교 대표로 온, 수십 명의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이 앉아 조용히 책을 읽거나 독후감을 쓰고 있었다. 나는 그때 막 초경을 시작했던 예민한 시기였는데, 유머러스하고 인자한 선생님인 줄 믿었던 독서 교사가 불쑥 내 몸을 더듬는 것에 죽을 것 같은 수치심과 혼란을 느꼈다.


이후로 나는 어떤 인간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회 상황에서건 겉으로 웃고 잘 지내려고는 노력하지만, 마음 깊이 철벽을 세웠다. 어느 누가 기회만 얻으면 내 몸을 함부로 침범하고 자신의 욕구를 푸는데 '이용'하려 들지 도무지 구별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심지어 아버지도, 삼촌도, 사촌들도 믿지 않았다. 교사들도 믿지 않았고, 교수들도 믿지 않았다. 남자 친구를 사귀다가도 조금이라도 폭력성이 느껴지거나 나를, 내 몸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과감히 연락을 끊고 헤어지는 쪽을 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공대를 갔다는 사실이 나로서도 좀 의아하기도 한데, 그건 아마도 내가 남자들의 세계에서 이겨내고 싶은, 남자들보다 더 강해지고, 더 과학 기술에 능해지고 싶은 그런, 어릴 때 남녀차별을 겪은 반작용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공대를 다니면서, 부지런히 체력을 키우고 싸움 기술을 익혔다. 한 때 나는 권투에 푹 빠져서 '주먹에 무게를 제대로 실어 날리는 법'을 연구 연습 중이었는데, 그날도 내 머릿속엔 주먹을 어떻게 날려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때는 바야흐로 꽃 피고 새 우는 대학 3학년 청춘의 초여름, 6월 기말 시험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고,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를 하다 귀가하려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시험기간 중에 하는 버릇대로, 양갈래로 머리를 땋고 큰 안경을 쓰고, 고3 수험생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하루 종일 공부에 시달린 진 빠진 영혼은 버스 정류장에 서서 '효과적인 주먹질'에 대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내 앞으로, 술 취한 남자 둘이 지나갔다. 동시에 내 가슴에 통증에 가까운 불쾌한 감촉이 남았다. 저절로 내 주먹에 온 몸의 무게가 실렸다. 방금 내 가슴을 침범한 새끼의 뒤통수에다 온 힘을 다해 강빤치를 날렸다. 그건 거의 자동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저 새끼를 때려야지' 하는 생각 같은 게 1도 없었으므로, 나는 스스로의 행동에 까무러치게 놀라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후폭풍을 감당해야 했다.


맞은 놈이 뒷목을 잡으며 돌아보았다. 조폭 같은 느낌이 드는 우람한 덩치였고, 그 옆에 있는 놈도 마찬가지였다.


잘못한 놈은 저 새끼니까 내가 여기서 꼬리를 내리면 절대 안 된다는 오기가 발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어 흔들어 보이며 외쳤다.


"한 번만 더 까불면 죽이뿐다* (*'죽이겠다'라는 의미의 부산 사투리)."


맞은 놈의 두 눈이, 자신이 양갈래 머리 땋은 얌전하게 생긴 여학생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한 번, 그 여학생의 입에서 나온 거친 표현에 두 번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 그대로 뒤돌아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지하철 역까지 뛰어가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갔다. 20분이면 갈 길을 40분이나 걸려서.


내가 미국에 오기 전까지 나는 인생이, 일상이 '갤러그 게임' 같았다. 함부로 침범하는 쓰레기들을 피해 뛰어 도망 다니는 일상. 나도 총알을 날릴 수 있게, 무기를 들고 다니고 싶은 욕구를 엄청나게 느꼈지만 그렇게까진 못했고, 대신 옷차림을 군인처럼 유지했다. 일부러 검은 군화를 장만해서 신고 다녔고, 철문이나 돌벽을 상대로 혹한 훈련을 거듭하여 주먹은 멍투성이 상처투성이 상태를 유지했다. 여차하면, 발길질이나 주먹질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성추행을 당한 즉시 나는 정신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치료받지 못했고, 20대 중반에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 나는 조그만 자극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겁쟁이 토끼 같으며 동시에 생존과 안전을 갈구하는 거친 야생 동물처럼 으르렁 거리며 삶을 이어갔다.


미국에 와서, 사람과 사람 간의 사회적 거리가 좀 더 넓은 것이, 어딜 가든 내 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이, 미국 남자들이 대체로 아시안 여자에게 별 관심과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이, 좀 외롭고 심심하긴 해도 나에게는 마음을 푹 놓고 쉴 수 있는 '안전지대'를 제공해 주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중년의 시간으로 깊이 들어왔고, 이젠 한국에 가도 40대 아줌마를 성추행하려 드는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아직 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 한국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을 묶는다. 몸은 늙어가도 내 마음의 일부는 그때 그 시간에 아직 머물러 있는 듯하다. 이렇게 내 '성추행' 사연을 열어 놓는 것이 치유와 회복의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한국에 가서 함께 있는 사람들을 마음 깊이 믿고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국을 누려보고 싶다.



글을 마무리 하려는데, 내 안의 한 목소리가 급히 뛰어와 나를 감싸 안으며 말한다.


그 일들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완전한 치유가 일어날 때까지, 네가 마음껏 자유로워질 때까지, 내가 끝까지 도울게.

P.S. 지금까지 쓴 모든 이야기는 개인적 경험이고 개인적 상처이니,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는 일로 오해는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할머니의 눈물을 보았던 날의 일기